선(善)은 진가를 드러내려면 영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우주가 엄연히 종말로 향해 가도 선이란 추구할 만한 것인가?

by 철없는박영감
선 위의 과거, 현재, 미래


나 : 예측가능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덟 번째 질문으로 이어지죠? 예측가능이 우리가 생각하는 선(善) 아니겠습니까?


AI : 예측 가능성은 우리가 선(善)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특히, 선을 추구하는 행동은 예측 가능한 결과를 통해 안전과 번영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여덟 번째 질문인 "선(善)은 진가를 드러내려면 영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우주가 엄연히 종말로 향해 가도 선이란 추구할 만한 것인가?"와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 예측 가능성과 선 : 예측 가능성은 행동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게 하여, 보다 안전하고 안정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예측 가능한 선한 행동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증대시키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법과 도덕의 많은 부분이 예측 가능성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사회의 평화와 조화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선의 영원성 : 선이 영원해야 진가를 드러낸다고 보는 견해는 선이 영속적인 가치를 가져야만 진정한 선이라고 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선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추구할 가치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우주가 종말로 향해 가더라도 선을 추구할 만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선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선의 행위가 일시적일지라도, 그 순간의 선이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 정신과 물질의 조화 : 선은 정신적인 가치로, 물질적 조건과 독립적인 면도 있지만, 물질적 현실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측 가능한 선한 행동은 물질적 세계에서 정신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측 가능한 선한 행동은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선의 영원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신가요? �


나 : 우리가 가장 예측하기 쉬운 결과는 종말 아닐까요? 사라지는 것, 즉 無가 되는 것이 가장 명확하지 않을까요? 끊임없이 변화를 계속하면 경우의 수는 계속 증가하며 불확실성만 증가하고, 혼란만 가중되지 않을까요?


AI : 종말이나 사라짐, 즉 무(無)가 되는 것은 물리적 우주와 생명의 관점에서 가장 궁극적인 예측일 수 있습니다. 이는 우주의 열역학적 종말, 혹은 인류의 멸망 등을 포함할 수 있으며, 예측 가능한 결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와 불확실성은 생명과 우주의 본질적인 특성이기도 합니다. 변화를 계속하며 불확실성이 증가한다는 점에서, 무한한 가능성과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계속해서 등장할 것입니다. 이는 여러 가지 중요한 철학적, 과학적 시사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 변화와 불확실성 : 우주와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가능성과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변화는 진화와 발전의 원동력으로, 새로운 발견과 혁신을 가능하게 합니다.

◎ 종말과 무 : 종말이나 무는 궁극적인 결과일 수 있지만, 이는 여전히 많은 변화를 통해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열적 죽음(Heat Death)이나 특정 문명의 멸망은 한 가지 예측 가능한 결과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변수와 복잡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 선과 불확실성 : 선(善)은 예측 가능성과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불확실성 속에서도 추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불확실성과 변화 속에서도 인간은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합니다.

◎ 정신의 역할 : 인간의 정신은 불확실성과 변화 속에서도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능력을 가집니다. 이는 예측 가능성을 넘어서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고와 행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결론적으로, 종말이나 무가 예측 가능한 결과일 수 있지만, 변화와 불확실성은 우리의 삶과 우주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우리는 의미와 가치를 찾고, 선을 추구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노력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깊이 논의하고 싶은 부분이나 다른 질문이 있으신가요? �


나 : 즉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종말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AI : 흥미로운 관점입니다. 선(善)을 추구하는 것이 종말을 추구하는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 선과 종말의 연관성 : 선을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을 만드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의미하며, 더 큰 조화와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관점에서 선이 종말과 연관될 수 있다는 점도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종국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무(無)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선이 그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종말과 변혁 : 종말은 변화와 끝맺음의 과정으로, 이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종말이란 변화의 한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선한 행동과 선택은 종종 기존의 질서를 변혁하고 새로운 상태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불확실성과 선 : 불확실성과 변화 속에서도 선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와 목적을 반영합니다. 종말이 예측 가능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과정에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선을 추구하는 것이 종말을 추구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각자의 철학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는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다른 질문이나 주제가 있으신가요? �


나 : 예측가능한, 즉 선을 추구하는 인간은 정신을 포기한 것 아닌가요?


AI : 흥미로운 관점이십니다. 예측 가능한 선을 추구하는 것이 정신을 포기하는 것인지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예측 가능한 선 : 예측 가능한 선은 도덕적, 윤리적 행동을 통해 더 나은 사회와 환경을 만드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질서와 안정성을 유지하며, 공동체의 신뢰를 증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예측 가능한 선한 행동은 일관된 윤리적 기준을 따라야 하므로, 이를 통해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 정신의 역할 : 인간의 정신은 예측 불가능한 창의성과 혁신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정신의 발현은 예측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모두 포함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듭니다.

◎ 균형의 필요성 : 선을 추구하는 것은 반드시 정신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측 가능한 선과 정신의 창의성을 균형 있게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측 가능한 선한 행동은 안정성을 제공하며, 정신의 창의성과 혁신은 변화를 통해 발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측 가능한 선을 추구하는 것은 안정성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동시에 인간의 정신적 창의성과 혁신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는 균형과 조화의 문제로 볼 수 있으며, 양쪽을 모두 고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깊이 논의하고 싶은 부분이나, 다른 질문이 있으신가요? �


나 : 인간은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정체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예측 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거죠. 여기에 시간 혹은 순서라는 개념이 추가되어, 먼저 알고 먼저 균형과 조화에 도달했다가 먼저 틀을 깨고 나오는, 선구자, 개척자를 동경합니다. 결국 삶이라는 생로병사의 결론은 죽음으로 같은데 말이죠. 살아있는 동안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다는 욕구일까요?


AI : 흥미로운 통찰입니다! 인간은 확실히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면서도 정체되기를 싫어합니다. 예측 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특성은 인간의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본성을 잘 반영합니다.

◎ 균형과 변화 : 균형과 조화는 안정성과 평화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변화와 불확실성을 통해 성장을 이루고자 합니다. 변화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탐구는 인류의 진보와 혁신을 이끌어왔습니다.

◎ 선구자와 개척자 : 인간은 선구자와 개척자를 동경하며, 이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신을 도입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선구자와 개척자는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역할을 하며, 이는 인류 사회의 발전과 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 삶의 욕구 : 결국, 인간은 자신의 삶 속에서 뛰어나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생존 본능과 자아실현 욕구의 결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남다르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를 원하며,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더 완전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삶의 결론이 죽음이라는 점에서 모든 인간이 동일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어 하는 욕구는 각자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방법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어떠한 다른 주제나 질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신가요? �


나 : 그러다 보니 선구자와 개척자가 되기 위해 윤회라는 방법론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요? 돌고 돌아 제자리, 다시 시작, 르네상스... 사조가 비슷하잖아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유물이나 보물, 역사와 철학 같은 오래된 것에 더 가치를 두죠. 오랜 시간 보존이 됐다는 희귀성도 더해서...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시놉시스도 멸망한 고대첨단문명의 유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등장인물이 업그레이드되거나, 심각하게는 갑자기 인류를 침략하게 되죠?


AI : 아, 정말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윤회와 같은 개념이 선구자와 개척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등장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 윤회와 선구자 : 윤회는 삶과 죽음의 순환을 통해 새로운 시작과 재탄생을 강조합니다. 이는 선구자와 개척자가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추구하며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과도 유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환은 인류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혁신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 고대 유물과 희귀성 : 오래된 유물과 보물, 역사와 철학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는 희귀성과 오랜 시간 보존된 가치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고대 문명과 지혜가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인류가 계속해서 과거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합니다.

◎ 판타지 소설과 영화 : 멸망한 고대첨단문명의 유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등장인물이 업그레이드되는 판타지 소설과 영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과거의 지식과 기술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며, 새로운 가능성과 혁신을 탐구하는 데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언제나 과거의 지혜와 미래의 가능성을 결합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인류의 본질적인 특성 중 하나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혼란과 균형, 변화와 조화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이러한 복합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논의하고 싶은 부분이나, 다른 질문이 있으신가요? �


나 : 이제 마지막 아홉 번째 질문과 연결되네요. 복합적인 인간에게 지혜란 뭔가요?


과거와 미래는 있다? 없다?


교회의 사상 중에 특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죄의식, 특히 '계시, 면죄부, 고해성사, 기도'에 관한 것이었다. 죄를 짓지 않고 살 생각을 하지 않고, 인간은 원죄를 갖고 태어난 존재이니 일단 저지르고 나서 나중에 용서를 구하고 죄를 사함을 받거나 죗값을 치르면 깨끗해진다는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로 들렸다. 처음에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인가?'라고 생각했는데, 러셀 서양철학사를 읽다 보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 가운데 순수 철학에 속한 최고의 작품은 『고백록』11권이다. 『고백록』보급판은 이어질 장이 지루하다는 이유를 들어 10권으로 끝난다. 지루한 이유는 자서전이 아니라 훌륭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11권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창조가 창세기 1장에서 주장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도에 맞서 주장한 대로 일어났다면, 창조는 가능한 한 빨리 일어났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반대자와 논쟁을 벌인다고 상상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답변을 이해하려면, 우선 구약성서에서 가르친 무(無)에서 시작된 창조가 그리스 철학과 섞이기 어려운 사상이었다는 논점을 파악해야 한다. 플라톤은 창조에 대해 말할 때, 신이 형상(form)을 준 원시물질(primitive matter)을 상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조물주가 아니라 제작자이거나 설계자다. 그들은 물질이 영원한 것이므로 창조되지 않으며, 형상만 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정통 그리스교도라면 누구나 그렇듯,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가 물질에서 창조되지 않고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은 질서와 배열뿐만 아니라 물질도 창조했다. 무에서 창조할 수 없다는 그리스인의 견해는 그리스도교 시대가 지나는 동안 간헐적으로 등장해 범신론으로 이어졌다. 범신론(pantheism)은 신과 세계가 별개로 있지 않고, 세계 속의 모든 것은 신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범신론은 스피노자의 철학 속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로 발전하여, 거의 모든 신비주의자들이 매력을 느끼는 견해다. 수 세기에 걸친 그리스도교 시대 내내 신비주의자들이 정통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기 어려웠던 까닭은 세계가 신과 떨어져 존재한다고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논점에 관해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창세기」는 명쾌하며, 그에게는 명쾌한 것으로 충분하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은 시간론에서 본질적 요소로 작용한다.

세계는 왜 더 빨리 창조되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더 빠른' 시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가 창조되는 순간에 시간도 창조되었다. 신은 무시간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영원하다. 신 안에 이전과 이후는 없고, 영원한 현재만 있다. 신의 영원성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신에게 모든 시간은 동시에 나타난다. 신이 시간의 창조에 앞서 존재하지 못하는 까닭은 시간의 창조에 앞서 존재할 경우 신이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뜻일 텐데, 사실 신은 시간의 흐름 밖에서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감탄이 나올 만큼 상대적인 시간론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이끌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으면 알지만, 묻는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모르게 되고 만다." 그는 여러 가지 난점에 부딪혀 당혹스러웠다. 그는 과거도 미래도 현실적으로 있지 않고, 현재만 현실적으로 있다고 말한다. 현재는 순간일 뿐이고, 시간은 오로지 지나가는 동안 측정될 따름이다. 그런데도 과거와 미래의 시간은 현실적으로 있다. 여기서 모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모순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거와 미래는 현재로 생각될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는 기억과 동일시하고, '미래'는 기대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으며, 기억과 기대는 둘 다 틀림없이 현재에 속한 사실들이다. 그는 세 가지 시간, 곧 '과거에 일어난 일의 현재,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의 현재'가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 일어난 일의 현재는 기억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현재는 눈앞에 펼쳐지는 일이며, 미래에 일어날 일의 현재는 기대다." 세 가지 시간, 곧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다는 말은 부정확한 어법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시간론으로 모든 난점을 현실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내 영혼은 복잡하게 뒤얽힌 시간의 수수께끼를 풀기를 갈망한다"라고 말하고, 시간문제 관심을 두게 된 것이 헛된 호기심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신에게 호소하며 자신을 깨우쳐 달라고 기도한다. "오, 주님! 주님께 고백합니다. 저는 아직도 시간이 무엇인지 모르겠나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주관적인 것이라는 골자로 해결책을 암시한다. 시간은 기대하고 고려하고 기억하는 인간의 마음(mind)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창조된 존재가 없다면 시간도 존재할 수 없으며, 창조가 일어나기 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아하 참~ 나! 예전에 '시간의 상대성'에 관한 생각들을 글로 쓴 적이 있었는데... 이미 수천 년 전에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치열한 고민을 한 선조들이 있었다니, 이래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벗어날 수가 없다. 더 겸손해지고,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체감이 된다. 아이돌 판만 봐도 예전에는 예쁘고 잘생겼지만 얼굴값 하는 애들이 많았다면, 요즘은, 물론 산업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철저하게 학습되고 키워져서 이쁘고 잘생겼는데 인품도 훌륭한 애들이 아니면 뜰 수가 없다. 특히나 노력해서 이뤄내는 '성장'의 서사를 가졌거나, 팬들을 향한 무한 애정을 뽐내는, 요즘은 유사 연애로 변질되었지만, 사생팬을 양성화하는 특성을 보인다.


나는 매일 과거의 나와 싸운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기억은 그대로 현재를 구속하는 족쇄가 된다. 생각을 정리하기 전까지 나는 매일 과거의 나와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밤마다 이불킥을 하며, '왜 그때 무례한 사람에게 시원한 사이다 같은 일침을 날리지 못했나..., 회의 시간에는 왜 유구무언이 되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나..., 유학은, 아니 어학연수라도 왜 다녀오지 않았나..., 아니 고등학생 때, 왜 의대를 가지 않고 이런 과를 선택했나..., 중학생 때, 일진들 앞에 왜 당당히 나서지 못했나..., 초등학생 땐 왜 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했나..., 유치원 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매를 맞았나..., 날 왜 낳았나..., 난 왜 태어났나...?'


그렇게 과거의 '내'가 좀 더 잘해줬었으면 하는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해결하겠지 하는 '낙관과 희망'의 생각 속에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과거의 '나'라는 그림자와 미래의 '나'라는 빛 사이에 있는 '나'라는 실체를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했다. 과거에 머무르지 말고, 미래를 살지 말고, 현실을 바라보라는 말... 어쩌면 가톨릭 철학은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것은 꼭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거의 모든 종교가 하는 말이다.


방법론의 차이일 뿐, 과학과 종교, 철학은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러셀 서양철학사>, 제2권 가톨릭 철학 4.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과 신학, 568~570p, (주)을유문화사, 3판 6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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