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고귀한 삶의 방식이 있다면 무엇이 그것을 이루며,

우리는 어떻게 고귀한 삶을 성취하는가?

by 철없는박영감
어~ 잠깐!


<러셀 서양철학사>의 철학질문은 9개였다. 그래서 기획 단계부터 서론과 결론을 포함해 총 11개의 Chapter로 개요를 짰다. 그런데 꼬리를 무는 질문이 끝났는데, 연재브런치북은 아직 2개의 Chapter가 남아있다고 한다. 결론을 제외하면, 아~ 뭔가 질문을 하나 빠트린 것이 분명하다. '뭐지?' 질문리스트와 제목을 하나하나 체크해 가며 뭐가 빠졌는지 대조했다. '앗! 잡았다. 요놈!' 포돌이의 희번덕한 삽화가 뇌리를 스쳐간다.


"만일 고귀한 삶의 방식이 있다면 무엇이 그러한 삶을 이루며, 우리는 어떻게 고귀한 삶을 성취하는가?"


잘 됐다. 안 그래도 중세 철학을 지나 근현대철학으로 넘어오면서 '이걸 어떻게 쓰지?'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빠트린 질문이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하하~ 전화위복이다. 이미 AI와의 대화는 지나갔다. 그래서 추가 대화는 진행하지 않았다. AI의 장점이자 단점이 똑같이 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나간 것을 복기하지 않는다. 지난번과 똑같이 해달라고 요청하면 불가능하다고 답한다.


원래 컴퓨터(디지털)라는 것이 같은 변수를 입력하면 같은 답이 가장 빠르게 나오게(재생) 하는 기구 아니던가? '0'과 '1'의 단순 반복으로, 특히 일관성과 오차 없음에 대해서 신뢰를 할 수 있던 대상 아니던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지금은 일관된 관점으로 답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공지능'이라며 열광한다. 똑같은 현상에 대한 다른 해석, 다른 관점... 즉, 다양성이라고 부르는 이 개념이 컴퓨터에 도입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손길이 닿아야 채울 수 있는 '빈 곳'을 알아서 채울 수 있는 창의성까지 실현됐다.


거의 첫 Chapter에서 철학이란 '빈 곳'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했었다. 바라는 바가 정교해지면 정교해질수록, '빈 곳'이 더 많이 생기게 마련이다. 자세히 말하면, 똑같은 것을 현미경으로 관찰했을 때, 안 보이던 '빈 곳'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이 다양성을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적대시한다. 노안이 와서 귀찮아졌거나, 현미경의 사용법을 익히기 싫어서, 과거의 망령에 기대어 매우 주관적(상대적)으로 판단하고 끝내버린다. 이런 점이 요즘 시대가 말하는 '철학의 부재'일 것이다.


근현대철학 : '철학, 중년이 되다'


어~ 잠깐! 지금까지 우리는 객관주의 철학에 대해 논해왔다. 기원전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의 대결에서 결국 소크라테스가 이겼음을 선언한 후, 철학자들은 이천 년 가까이 그 안에서 지지고 볶고 싸웠다. 그런데 상대주의가 '철학의 부재'와 함께 죽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 이게 뭐야? 뭔가 허무하다. 종교의 그늘에서 벗어난 근대 사회는, 특히 철학은 매우 주관적으로 변한다. 온갖 사회현상들에 대해 저마다의 해석과 해법을 내놓으며 정치화된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때도 과거로의 회귀를 선택했다. 철학이 나이가 들었다고 할까? 어느덧 중년이 된 '철학'은, 꿈 많던 어린 시절은 매우 순수했고, 추억 보정으로 '그때가 살기 좋았지'라는 후회와 반성으로 점철된 회의주의에 빠진다. 더 이상 최신곡을 찾아 듣지 않게 되면 그때부터 나이가 든 거라고 하지... 아마? 어느새 요즘 노래보다는 7080 추억의 팝송이나 옛날 가요를 더 찾아 듣게 되고, '오징어 게임'처럼 추억의 놀이를 다시 소환하기도 한다. 그게 쉬우니까...


그래서 중년의 철학은 다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환한다. 사실 소환했다기보다는... 음~ 이렇게 설명하면 될까? 혼란만 가중시키던 '종교'라는 해석본을 버리고, 다시 원서를 집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패션도 돌고 돈다고 하던데... 그러면 패피들은 이렇게 반론한다.


"패션을 돌고 돌지만 똑같진 않다. '복각'을 해도 뭔가 유니크한 '갬성'을 추가한다."


어쩌면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현대철학이 플라톤의 사상에 주석을 단 것뿐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열광하는 NJZ(그룹명이 뉴진스에서 엔제이지로 바뀌었다지요?)도 일본에서 '푸른 산호초'라는 80년대 일본 전성기 시절의 시티팝을 팬미팅에서 다시 불러 일본에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패션계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포장한다.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을... 신세대에게는 새로움을 선사하는 무대...!' 히히 이게 말이여, 방귀여? 우리에게 구닥다리인 국악과 트로트는 신세대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돌고 돌아 본질은 같다.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그리고 '승자의 전유물'이라고 하는 역사도 마찬가지다. 철학사도 그렇다.


과거 계유정난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사건에서 '세조, 단종, 생육신, 사육신, 한명회'라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렇게 변했다고 한다. '忠'을 가장 큰 미덕을 삼던 시절, 폐위된 단종에게 충성했던 '생육신과 사육신'의 이름 하나하나를 암기하는 것이 중요한 시험문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忠'을 강조하던 시절이 끝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는 지금의 압구정을 만들었다는 '한명회'가 각광을 받게 된다. 실용주의를 강조하며, 드라마도 만들어지고, 각 종 책도 많이 출판됐다. 한명회는 생육신과 사육신을 만든 장본인이다. 상대주의는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모순이 많다. 객관주의는 과학적, 논리적이지만 오류가 많다. 둘 다 양시론과 양비론을 동시에 펼칠 수 있다.


고귀한 삶도 마찬가지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는 덕(virtue) 있는 삶을 고귀한 삶으로 보았다. 그는 덕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공동체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근대 칸트는 실천적 이성(practical reason)을 통해 고귀한 삶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도덕법칙을 따르고 타인을 존중하며 자율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현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고귀한 삶을 성취하기 위해 개인이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인식하고, 자신이 의미 있는 삶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선택과 행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가? 선택이라는 개념이 많이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왜'가 중요하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 그리고 짧은 소견으로 '외로움'이라는 답을 하나 얻었지만 답이 아닐 수도 있다. 매트릭스에서 이 장면을 그냥 문제를 해결하는 단서 정도로 보아 넘겼었는데... 다시 보니 참 심오한 말이다.


https://youtu.be/PkAtqXnO_pY?si=qImKsETI5QDt1UUl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