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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May 10. 2024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이영광 <높새바람같이는>

 높새바람같이는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이영광, 『아픈 천국』, 창비, 2010.


당신과 함께했던 시절을 회상한다

높새바람같이 따듯했던 시절이었다

당신을 마주 보고 웃을 때면

못난 내가 예뻐 보이던 시절이었다

당신이 내게 웃어 주어서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었다


'높새바람'은 '동북풍'을 달리 이르는 말. 주로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태백산맥을 넘어 영서 지방으로 부는 고온 건조한 바람으로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박성우 시인은 <높새바람같이는>이 '넝마'와 '높새바람'으로 '차고 습한 나'를 시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출처: '시가 어려운 당신에게' 56




이영광 시인의 <높새바람같이는>을 읽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As Good as It Gets, 1997>에서 멜빈이 한 말을 떠올렸다.


멜빈은 로맨스 소설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현실에서는 인간관계에 서툴다. 강박 장애에 시달리는 그는 배려심이 없고 괴팍한 성격에 결벽증이 있다. 유일하게 외출하는 시간은 식당에 갈 때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주문한다. 음식 주문도 같은 사람에게 한다. 그가 좋아하는 웨이트리스 캐럴이다.


멜빈과 캐럴이 고급 식당의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캐럴은 멜빈의 말에 마음이 상했다. 자리를 떠나려고 일어선 캐럴은 멜빈에게 칭찬을 하나 해보라고 한다. 멜빈은 캐럴을 만나고부터 싫어하는 약을 먹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캐럴이 그게 어떻게 칭찬이 되냐고 물으니 멜빈이 이렇게 대답한다.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당신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

캐럴은 인생 최고의 칭찬이라고 답했다. 당신으로 인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는 말 이상의 찬사가 또 있을까. 최고의 칭찬이자 고백이다.


멜빈이 캐럴을 칭찬하는 장면이 또 있다. 캐럴의 집에 찾아갔을 때다. 상심한 캐럴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I might be the only person on the face of the earth that knows you're the greatest woman on earth. (중략) I think most people miss that about you, and I watch them, wondering how they can watch you bring their food and clear their tables and never get that they just met the greatest woman alive. And the fact that I get it makes me feel good... about me."
"당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라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일지도 몰라요. (중략)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나는 의아해하면서 사람들을 지켜봐요. 어떻게 그 사람들은 당신이 음식을 가져오고 테이블을 치우는 걸 보면서도 방금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를 만났다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지. 그리고 나는 그걸 알아본 게 뿌듯해요. 나 자신이요."

멜빈은 캐럴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라고 칭찬하면서 그걸 알아본 자신을 추켜세웠다. '당신과 함께여서 내가 좋아지는 마음'을 잘 표현했다.


연애의 목적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과정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과는 비슷하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연애란 '당신과 함께해서 내가 더 멋져 보이는 마법'인지도 모른다.


<높새바람같이는>은 연시(戀詩)다. 그러나 연모의 대상을 사람으로만 생각하라는 법은 없다. 열정을 쏟았던 무언가를 대입해서 읽어도 좋겠다. 이를테면, '글'이나 '노래', 혹은 '시'라든가.


 시와 함께라서 내가,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지난 7일, 백상예술대상 60주년을 기념해 69년 차 배우 이순재(1934~ )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연극 무대에 올랐다. 그는 노인 배역을 맡기 위해 오디션에 참가한 배우를 연기하며 예술과 연기에 관한 철학을 이야기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을 옮긴다.


"연차가 많이 높으신데 왜 아직도 연기에 도전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다.

"연기라는 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연기에 완성이 없다는 얘기가 바로 그겁니다. 잘할 순 있어도 완성은 아니다. 우리는 완성을 향해서 항상 고민하고 노력하고 도전하는 거예요. 이게 배우의 역할이고 배우의 생명력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기'를 '시'로 '배우'를 '작가'로 고쳐 읽으니 더 깊이 와닿았다.


이어진 질문은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세요?"였다. 그의 대답이다.

"나는 뭐 상도 많이 못 타봤으니까 상 탈 배우는 아니고 열심히 한 배우다. 이렇게만 기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90세 원로 배우에게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해줘서 고마웠다. 무대에서 죽는 게 꿈이라는 현역 배우에게 당연히 했어야 할 질문이었다. '열심히 한 배우'로 남고 싶다는 대답도 감동이 있었다.


이순재 배우는 지난해 연극 <리어왕>에서 '리어왕'을 연기해 세계 최고령으로 '리어왕'을 연기한 배우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 작품의 한 부분을 연기하고 <예술이란 무엇인가?> 무대에서 퇴장했다.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의 문장이다.

"예술이란 영원한 미완성이다.
그래서 나는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한다."


이순재 배우가 같이 연기하고 싶다고 한 배우 최민식, 이병헌도 90세가 되어서 백상예술대상 무대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또 감상을 글로 쓰겠지.


작가는 현직 작가와 전직 작가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평생 현직 작가로 살 수 있을까.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도 글을 쓰는 내가 자꾸 좋아진다고,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에 완성이 없다는 얘기가 바로 그겁니다. 잘  순 있어도 완성은 아니다. 우리는 완성을 향해서 항상 고민하고 노력하고 도전하는 거예요. 이게 작가의 역할이고 작가의 생명력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작가다. 이렇게만 기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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