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경 May 17. 2024

내 것이 될 수도 있는 상처들을 짊어졌다

오성인 <설문>

 설문

 

 둬야 할 곳을 찾지 못해서 꿈을 대신

 짊어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

 

 관심이 있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일이 있습니까

 

 새로 학기가 시작되어 무엇이 되고 싶느냐는

 설문지에 물건을 새로 만들고 짝을 맞추기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과학자가 좋겠다고 했는데

 

 오래 사용한 물감 용기처럼 곳곳이 찌그러지고

 새는 곳이 많은 엄마는 만화가가 어울린다고 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에 자주 이끌리는지

 

 모르는 아버지와 엄마의 꿈을 적어 넣었다

 내 것이 아니라서인지

 

 나는 길 아닌 곳으로 가다가 다치기 일쑤였다

 

 어제는 팔꿈치에서 피가 많이 나왔는데 오늘은

 무릎이 살짝 아프기만 하고 피는 나지 않아요

 간혹 피는 소리를 지르며 빠르게 달려가거나

 천천히 걸어가기도 해요

 

 상처를 읽고 쓰는 데 소질이 있구나 너는

 글을 써 보면 좋겠다 단, 통증은 누구에게도 먼저

 

 보이거나 고백하지 말고

 

 국어 선생의 말을 듣고 내 것 아닌 꿈 대신

 내 것이 될 수도 있는 상처들을 짊어졌다

 

 누구보다 피의 언어를 잘 해독하고 싶었다


오성인, 『이 차는 어디로 갑니까』, 걷는사람, 2023.


 젊은 시인은 광주의 아픔을 시로 쓰며

 피의 언어를 깨우쳤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상처투성이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고백하지 못한 통증을

 

 이방인의 눈으로

 죄인의 입으로 노래했다

 

 내 것이 아닌 노래에

 나는 왜 얼굴이 붉어졌나

 

 내 것이 아닌 상처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

 

 나는 그저 시인의 노래를 들었을 뿐인데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일부




<설문>에서 오성인 시인은 그가 시인이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상처를 읽고 쓰는 데 소질이 있"다고 한 중학교 국어 선생님의 말에 "내 것 아닌 꿈 대신/ 내 것이 될 수도 있는 상처들을 짊어"지기로 마음먹었다. "누구보다 피의 언어를 잘 해독하고 싶"은 소망을 품었다. 그에게 '피의 언어'란 무엇이었을까.


"태생적 죄책감"


1987년 광주에서 태어난 오성인 시인은 시집 『푸른 눈의 목격자』(2018)와 『이 차는 어디로 갑니까』(2023)에서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이야기했다.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그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시를 쓰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그는 '태생적 죄책감'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 죄책감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 봄, 상병으로 군대에 복무하던 저자의 아버지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박달나무 방망이를 만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방망이가 5·18 때 시민을 제압하는 계엄군의 ‘충정봉’으로 쓰였음을 알게 되어 큰 충격에 휩싸인다. 제대 후 대학생으로 돌아갔지만 더 이상 그는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국가폭력에 동조했다는 죄책감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 지금까지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독에 가둔 채로 살고 있다." (출처: 전북도민일보)


"슬픔을 이야기하는 방식"


오성인 시인의 첫 시집 『푸른 눈의 목격자』(2018)에서 그가 슬픔을 표현한 방식은 직설적이다. 그 시집에 실린 <위르겐 힌츠페터 - 푸른 눈의 목격자>는 독일 언론인 힌츠페터(1937~2016)를 화자로 광주의 참상을 '씻어 내지 못한 피', '차오른 핏물', '으깨진 살점', '절규', '망자', '곡소리', '비극' 등의 시어로 묘사했다. 오성인 시인은 "슬픔을 슬픔답게 다루는 시인", "슬픔의 언저리를 맴돌거나 서성이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첫 시집을 발표한 뒤 오성인 시인은 광주의 아픔을 목도했다. 2019년 3월 전두환이 재판에 출석하러 광주에 왔을 때 보인 반성 없는 태도에서 슬픔과 무기력함을 느꼈다. 그는 "시를 쓰는 일은 거듭되는 시대의 폭력과 맞서는 일이자 시대를 향한 울분과 연대하는 일"이라며 "어쩌면 내 평생의 사명 내지는 혁명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출처: 광주일보)


오성인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이 차는 어디로 갑니까』(2023)에서 슬픔을 표현한 방식은 내밀하고 고백적이다. 그 예로 <담>에서 "내 안에 담을 쌓아 둔 적 있었다"라는 화자의 고백과 <이사>에서 "집을 자주 옮겨 다니게 된 이유를/ 알게 될수록 광주와의 거리가 좁혀졌다"라는 화자의 깨달음을 들 수 있다. 피폐한 도시와 전쟁 속 개인의 삶을 통해 시대의 울분과 슬픔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울부짖는 소리보다 담담하게 건네는 말에서 더 큰 슬픔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이 시집이 그랬다.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아서, 그곳에 산 적이 없어서 광주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오성인 시인은 그 시절을 살지 않았어도, 광주에서 자라지 않았어도 광주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듯하다. 내 것이 아닌 상처 또한 내 것이 될 수 있음을 그에게서 배웠다.


오성인 시인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44주년을 맞아 산문집 『세상에 없는 사람』(2024)을 출간했다. "이번 산문집이 어떤 도화선이 되어 발포 명령자 등 여전히 지지부진한 오월의 진실이 밝혀지고, 가해자들의 사죄가 이루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말했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 단과대 노래패 활동을 했다. 정치의식이 투철했던 건 아니었고 그저 노래가 좋아서였다. 온갖 집회에 참석하는 열성파도 몇몇 있었지만, 우리 중 다수는 집회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신을 스스로 '딴따라'라고 불렀다.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처럼 대학생이 민주화 투쟁을 해야 할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90년대 말 IMF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이 아닌 취업을 위해 거쳐 가는 학원 같은 곳이 된 듯했다. 그 시기에 처음 민중가요를 접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조국과 청춘, 꽃다지, 천지인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다. <임을 위한 행진곡>, <장산곶매> 같이 비장한 노래보다 <우산>, <언제까지나>, <이 길 가다보면>, <전화카드 한 장>, <청계천 8가> 같은 잔잔한 노래가 좋았다.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듯 90년대 중후반에는 그처럼 대중성 있는 민중가요가 등장했다.


조국과 청춘이 1996년에 발표한 5집에 수록된 <우산>은 시들어가던 운동권을 비 오는 날에 빗대었다는 해석이 있다. 이후 사회운동을 이끌던 운동권이 분열했고 조국과 청춘은 1998년 6집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조국과 청춘의 마지막 앨범에 실린 곡 <언제까지나>를 소개한다.


'조국'과 '청춘'을 떠올리게 되는 5월,

변치 않고 노래하려는 마음으로.


조국과 청춘 <언제까지나>

아무도 잊지 않았지
소중한 청춘을 다해
온 마음으로 세상을 노래하던
우리 작은 용기

그 작은 노래로 사랑함을 알고
이렇게 큰 힘 됨을 알게 한 사람들
지금 이 자리에

세월이 흘러 멀어져 간 시간들
그 마음 다시 모아
이 세상 끌어갈 큰 줄을 엮으리

세월 속에 우리 모습 변하여도
그 노래 잊지 않으리
새로운 세상 그 앞에선 우리
변치 않고 노래하리
언제까지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44주년


소오생 님께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서 오성인 시인의 <설문>과 제 글의 일부를 낭독해 주셨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전 06화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