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 <내 것이 될 수도 있는 상처들을 짊어졌다> 낭송
@강경 작가님의 고향은 강경입니다. 고향 이름을 필명으로 삼을 만큼 고향을 사랑하는 분입니다.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지만 언젠가 고향 강경에 돌아갈 날을 꿈꾸며 시와 수필을 쓰고 있는 분입니다.
작가님의 관심사는 '소통'입니다. 시와 문학을 소통의 매개체로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꿈꾸는 분입니다. 독립운동가의 자손답게, 우리 사회의 폭력과 부조리, 모순과 갈등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창작 활동에 임하고 계십니다.
저는 작가님의 수필을 참 좋아합니다. 수필 속에 시가 흐르고, 시가 곧 수필이 됩니다. 게다가 담담하고 간결하고 정돈된 언어로 조단조단 해설까지 해주시니, 독자에게는 그 이상 다정하고 친절한 작가가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작가님의 <강경 가는 길>, <민박집 아저씨>, <출필고 반필면>과 같은 작품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낭송하면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는 루쉰魯迅 (1881~1936)의 대표작인 <고향>을 대하는 느낌입니다. 루쉰의 고향인 소흥紹興에 찾아가 보고 싶듯, 언젠가 강경에 가서 살고 싶고 그곳의 민박집 아저씨가 되고픈 마음까지 들게 합니다.
오늘은 5월 18일. 어제 작가님이 수필 한 편을 올리셨습니다.
강경, <내 것이 될 수도 있는 상처들을 짊어졌다> ☜ 클릭
44년 전 그날의 아픔과 슬픔을 유가족 분들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작가님의 글을 낭송해보고자 합니다. 518을 소재로 이렇게 담담하고 정돈된 언어로 간결하게 슬픔을 그려낸 글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그 아픔의 역사 정신을 잘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유난히 애로사항이 많더군요.
몇 번이나 녹음을 다시 하고 또다시 해서 올리려고 했더니, 이번엔 용량 초과라네요.
서너 번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 이상합니다. 다른 때는 별문제 없이 올렸는데요.
부득이 작가님의 글을 발췌해서 다시 낭송해 봅니다.
여러분께서는 나중에 직접 링크를 따라가서 원문의 느낌을 제대로 감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자꾸 낭송하니 그만큼 518의 피맺힌 한恨과, 작가님이 글을 쓰실 때의 정서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오늘 안으로 올릴 수 있을지 염려됩니다.
작가님의 이 수필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 오성인 시인의 시 <설문> 소개
(2) 작가님의 자작시
(3) 작가님의 해설
둬야 할 곳을 찾지 못해서
꿈을 대신 짊어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
관심이 있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일이 있습니까
새로 학기가 시작되어 무엇이 되고 싶느냐는
설문지에 물건을 새로 만들고 짝을 맞추기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과학자가 좋겠다고 했는데
오래 사용한 물감 용기처럼 곳곳이 찌그러지고
새는 곳이 많은 엄마는 만화가가 어울린다고 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에 자주 이끌리는지
모르는 아버지와 엄마의 꿈을 적어 넣었다
내 것이 아니라서인지
나는 길 아닌 곳으로 가다가 다치기 일쑤였다
어제는 팔꿈치에서 피가 많이 나왔는데
오늘은 무릎이 살짝 아프기만 하고 피는 나지 않아요
간혹 피는 소리를 지르며 빠르게 달려가거나
천천히 걸어가기도 해요
상처를 읽고 쓰는 데 소질이 있구나 너는
글을 써 보면 좋겠다 단, 통증은
누구에게도 먼저
보이거나 고백하지 말고
국어 선생의 말을 듣고 내 것 아닌 꿈 대신
내 것이 될 수도 있는 상처들을 짊어졌다
누구보다 피의 언어를 잘 해독하고 싶었다
<설문>에서 오성인 시인은 그가 시인이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상처를 읽고 쓰는 데 소질이 있"다는 국어 선생님의 말에 "내 것 아닌 꿈 대신/ 내 것이 될 수도 있는 상처들을 짊어"지기로 마음먹었다. "누구보다 피의 언어를 잘 해독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1987년 광주에서 태어난 오성인 시인.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그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시를 쓰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그는 "시를 쓰는 일은 거듭되는 시대의 폭력과 맞서는 일이자 시대를 향한 울분과 연대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피폐한 도시와 전쟁 속 개인의 삶을 통해 시대의 울분과 슬픔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울부짖는 소리보다 담담하게 건네는 말에서 더 큰 슬픔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이 시집이 그랬다.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아서, 그곳에 산 적이 없어서 광주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오성인 시인은 그 시절을 살지 않았어도, 광주에서 자라지 않았어도 광주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듯하다. 내 것이 아닌 상처 또한 내 것이 될 수 있음을 그에게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