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신경림 시인을 기리며
어려서 나는 램프불 아래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전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비, 1998.
수업 중에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산들거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기차가 보이면 그 안에는 누가 타고 있을지, 그 사람은 어디에 가고 있을지를 상상해 보곤 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저 기차를 타고 작은 마을을 떠나 큰 도시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도시로 가려던 나의 꿈은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이루어졌다.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재미있고 신나는 일은 서울에만 있는 것 같았다. 강경에서 보내는 시간은 심심하고 지루하기만 했다. 서울행 기차를 탈 때면 놀이공원에 가는 것처럼 설렜고, 반대로 강경행 기차를 탈 때는 놀이공원에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처럼 아쉬웠다.
이듬해 미국 유학길에 올라 서울과 강경을 오가던 기차여행을 한동안 할 수 없게 됐다. 그곳에서 공부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기르며 30대를 보냈다.
어린 시절 따분하기만 했던 고향의 풍경은 외지 생활에 지쳐 돌아온 나에게 평온함과 여유를 주었다. 언제라도 떠나고 싶었던 그곳은 이제 언제든지 가고 싶은 그리운 안식처가 되었다.
- 수필 <강경 가는 길>에서 발췌
작년 5월 수필 쓰기 모임에서 철도문학상 공모전에 도전하기로 했다. <강경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철도와 관련된 어린 시절의 추억, 고향을 떠나고 나서 깨달은 고향의 의미에 관한 글을 썼다. 수상권에 들지 못했지만, 고향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 글로 쓸 기회가 되어서 만족했다.
얼마 후 한국을 방문해 고향 문학관에서 시 창작 수업을 들었다. 시인 선생님이 추천한 여러 시집 중 신경림의 『농무(農舞)』(1973)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이 있었다. 신경림의 <농무>, <갈대>, <목계장터>, <가난한 사랑 노래>를 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있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처음 본 시였는데,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다. 어린 시절 세상의 전부였던 고향을 떠나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옛 시절을 회상하는 화자의 고백이 마치 내 이야기인 것 같았다.
소읍에서 도시로, 또 미국으로 건너와 떠돌며 살았다. 많이 보고 들을수록 고향을 향한 마음이 커졌다. 나의 뿌리가 고향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나는 어떤 시인이 되고 싶은가'하는 고민에 답이 되어준 시다. 민중의 삶을 노래하는 향토 시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됐다.
지난 22일, 신경림 시인이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현대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신경림 시인을 기리며 그의 첫 시집 『농무』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1973년 신경림 시인은 시집 『농무』를 300부 한정판으로 '월간문학사'에서 자비로 출판했다. 이 시집으로 그는 이듬해 제1회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1975년 3월 '창작과비평사'에서 '창비시선' 제1권으로 『농무』의 증보판을 출간했다. <농무>는 시집에 실리기 전에 계간지 『창작과 비평』(1971)을 통해 발표됐다. <농무>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신경림, 『農舞』,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은 『농무』에서 1960~1970년대 산업화, 공업화를 배경으로 쇠퇴한 농촌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절망적이고 암울한 상황을 신명 나는 춤사위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제1회 만해문학상 심사를 맡은 김광섭 시인은 『농무』의 의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신경림씨의 시는 농촌의 이미지를 쉽게 우리에게 환히 보여주고 있다. 시집 『농무』에 실린 40여 편은 모두 농촌의 상황시다. 어느 한 편에도 오랜 역사에서 빚어진 오늘의 애사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의 현대시가 반세기 후에 얼마나 남을 것인지 예언할 수는 없으나, 오늘의 농촌을 반세기 후에 시에서 보려면 시집 『농무』에 그것이 있다하겠다. 거기 그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신경림씨의 시가 가지는 문학사적 의미가 있다. 시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을 재고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974년 5월
이후 정확히 반세기가 지났다. 김광섭 시인의 예상대로 『농무』는 여전히 농민의 고달픈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음은 책 뒤에 실린 신경림 시인의 말 일부다. 그의 초심을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다.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말자, 분수를 알자, 이것이 이를테면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진 소박한 소신이었다. 그 결과 여기 증보판을 정리하면서, 한 용기없고 소심한 자화상을 대하게 된다. 겁 많고 연약한 가락들은 내가 참으로 증오하는 터이지만, 이것들이 결코 내 참목소리의 한가닥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언제고 이것들을 내 몸에서 완전히 털어버릴 때, 그리하여 내 목소리가 좀더 우렁차고 도도해질 때 나는 여러분 앞에 당당한 얼굴로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1975년 3월
신 경 림
신경림 시인은 평생 초심을 지켜 우렁차고 도도한 목소리로, 당당한 얼굴로 사회문제에 소신 있게 발언했다. 11번째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사진관집 이층』(2014)에 실린 시 한 편을 옮기고 글을 마친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신경림 시인의 삶과 작품에 관해 다뤄야 할 이야기가 많지만, 시인이 내게 준 영향과 그의 초심을 담은 첫 시집에 관한 내용만을 다뤘다. 신경림 시인에 관해 더 알고 싶은 독자께 장석주 시인의 책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4』(2007)에 실린 글 <신경림 - 농경 사회의 풍물과 정서>와 마지막 시집 『사진관집 이층』 출간 후 낭송회에서 한 인터뷰를 추천해 드린다.
참다운 시인의 삶을 보여준 故 신경림 시인(1935~2024)을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