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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Jun 21. 2024

말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끝내 털어놓게 되는 이야기들

박세랑 <아름다운 과거>

    아름다운 과거


    짓밟힌 잔디처럼 누워 있던 목소리가 이곳저곳으로 번져가고 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끝내 털어놓게 되는 이야기들 여름의 잡초처럼 녹색으로 물들던 상처들이 점점 번져가다 파도가 된다 덮쳐오는 슬픔과 밀려드는 과거 사이에서 파도는 한 자락씩 푸른 늑대가 되어 밤하늘을 날아다닌다* 홀로 서 있던 빨간 등대가 늑대들에게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면 우거진 여름 안으로 구불구불 날아드는 늑대들 숨기면 숨길수록 더 또렷해지는 불안이 보름달처럼 높이 떠오르고 우울이 거대한 혹등고래를 타고 천천히 떠내려온다 계속해서 덮쳐오는 해일과 파도 속에서 이야기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네 숨겨오던 불온한 상처들에 대해서 한 번쯤은 온전히 이해받고 싶었지 잠잠히 듣고 있던 당신의 동공 속에서 슬픔이 망각의 비로 흘러내린다 잔디와 파도와 늑대가 혹등고래를 타고 천천히 떠내려간다


*미로코 마치코의 그림책 『늑대가 나는 날』(유문조 옮김, 한림출판사, 2014) 제목에서.


박세랑,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문학동네, 2021.


잔디 언덕에서 내려와 모랫길을 걸었다


해일이 지나간 바다

푸른 늑대 삼키고 떠내려가는 혹등고래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삼켜야 하는 말

그런 말이 시가 된다고 믿었지


네 손목에 그려진 문신이

내 팔에 난 상처와 닮아서 나는

아파도 외롭지 않았다


흰 모래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나는 저 멀리 고요한 언덕을 바라보았다




지난 18일 '리치언니' 박세리가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저런 자리에 나올 사람이 아닌데. 안타깝고 속상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20년 넘게 알고 지냈다는 한 기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일을 막을 수는 없었냐'라고 물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담담하게 기자회견에 임했던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과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그녀의 명예롭고 아름다운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끝내 털어놓게 되는 이야기들' 앞에서.


박세리가 이사장으로 있는 박세리희망재단은 박세리의 아버지를 사문서위조 및 위조사문서행사 혐의로 고소했다. 그는 국제골프학교와 국제골프아카데미를 설립하는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사업참가의향서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재단과 협의하지 않고 임의로 도장을 제작해 사용했다. 박세리는 수년간 아버지의 채무를 변제해 왔으나 감당할 수 있는 수위를 넘겼다며 선을 그었다.


가족으로부터 받은 고통과 상처를 고백하는 유명인의 기자회견이 전에도 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해자가 되는 이야기. 곪을 때까지 곪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서야 터져 나오는 말. 궁지에 몰려 해명해야 하는 자리에서 온전히 이해받고 싶은 이가 삼켜온 말을 뱉어낸다.


위로의 뜻을 담아 전하고 싶은 박세랑의 시 <아름다운 과거>.




박세랑 시인은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에서 발랄한 말투와 동화적 상상력으로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2차 가해 등의 문제를 다룬다. 그중 2차 가해를 다룬 <대면>과 <파란 말>이 기억에 남는다. 뚱한 펭귄에 끌려서 봤다가 장대비 맞은 것처럼 아팠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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