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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Jun 14. 2024

어느 날 한 개의 공이 너를 찾아왔다

성미정 <야구처녀의 행복한 죽음>

    야구처녀의 행복한 죽음


    모든 야구는 거대한 야구성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야구성 안에 들어가기 위해선 야구모자를 써야 했다 야구모자는 비쌌고 넌 가난한 야구처녀에 불과했다 사실 가난한 야구처녀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난하면 야구모자를 쓸 수 없다 누구도 널 야구처녀로 인정하지 않았다 넌 너만의 야구처녀였을 뿐이다 너는 늘 야구성 밖을 서성였다 관중의 환호성을 들으며 야구를 상상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어느 날 한 개의 공이 너를 찾아왔다 넌 그렇게 믿고 있다 한 번의 타격으로 벽을 넘은 공은 흔치 않았고 가격은 벽만큼이나 높았다 넌 그런 공을 주워다 팔기 시작했다 느리긴 했지만 돈이 모여갔다 야구성을 향한 너의 열망도 서서히 성문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그날 너는 마지막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은 그날따라 너의 두 손을 외면하고 머리로 향했다 경기가 끝나고 야구모자를 쓴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야구아이들이 소리쳤다 검붉은 피로 엉킨 야구공이다 처음 보는 야구다 야구어른들은 야구아이들에게 충고했다 야구는 몹시 위험한 경기란다 야구모자를 쓰고 견고한 야구성 안에서 오래된 규칙에 따라 해야 한단다 야구어른들은 야구아이들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이들의 눈으로부터 너의 미소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비록 야구성 밖이었으나 그토록 사랑하던 야구에게 살해당한 너는 행복했다 부서진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너는 이제 야구모자 따위는 필요치 않은 너만의 야구성으로 떠났다 그건 야구성 안에서 경기를 바라만 보던 사람들은 결코 날릴 수 없는 역전의 홈런이었다


성미정, 『대머리와의 사랑』, 문학동네, 2020.


    나는 야구처녀 시절을 거치지 않고 야구아줌마가 되었다 아직은 누구도 나를 야구아줌마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나만의 야구아줌마일 뿐이다 시작은 한 개의 공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나를 찾아온 공을 손에 쥐었을 때 나는 그것이 야구공인 것을 알아봤고 야구공을 잡은 이상 그냥 아줌마였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가끔 야구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던 때를 그리워한다 야구아줌마의 삶이란 야구모자를 쓰고 야구성에 들어가거나 나만의 야구성으로 떠나거나 어쨌든 야구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하면 야구성을 생각하지 않고 야구를 즐길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나만의 야구할머니가 되어가고 있다




야구장에 간 적이 손에 꼽힌다. 서울로 대학 가서 처음으로 대학 야구팀 경기를 보러 갔다. 다들 가니까 따라갔었다. 유학 온 미국 도시의 야구팀 경기를 보러 간 적이 한 번 있었고, 지금 정착해 살고 있는 미국 도시의 야구팀 경기를 두 번 보러 갔었다. 그러고 보니 삶에 변화가 생기고 다른 도시로 이주했을 때 기념하듯 야구 경기장을 찾았다.


오랜만에 시로 야구를 다시 만났다. 성미정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에는 야구를 소재로 한 시가 11편 실려있다. '야구' 연작은 야구에 빗대 삶을 이야기한다. <야구처녀의 행복한 죽음>은 제도 밖 소수자로서의 개인, 남성 위주 사회에서 여성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야구처녀의 행복한 죽음>이 내 심장 가까이에 자리 잡은 건 시인 선생님의 해설을 듣고 나서다. 야구를 '문학'으로, 야구성을 '제도'나 '권위'로, 야구모자를 '등단' 혹은 '제도권 교육'으로 읽으면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사회 비판 담론이 아닌 나의 이야기로 읽게 된다. 야구공에 머리를 맞아 목숨을 잃어도 행복한 야구처녀에게서 창작자의 순정과 열정, 희열을 느낀다.


어쩌다가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게 된 건지. 시집을 읽거나 시를 쓸 때면 내 안의 또 다른 자아가 튀어나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너는 인간 행동을 수치화해서 분석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과학자가 아니었냐고. 숫자로 읽을 수 없는 문장들 사이에서 왜 헤매고 있느냐고. 나는 대답한다. 어느 날 한 개의 공이 나를 찾아왔고, 그 공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야구가 있다. 역전의 홈런을 날릴 기회가 올지는 알 수 없다. 내게 찾아온 한 개의 공. 그 기쁨을 잊지 말기로 하자. 스스로 하는 다짐이다.


당신의 야구는 무엇입니까?




야구가 야구가 아닌 걸 아는 당신과 함께 읽고 싶은 시 한 편 옮기고 글을 마친다. 평론가 황현산은 성미정 시인을 "문단의 뛰어난 랩퍼"라고 불렀다. 랩 하듯 읽어주시기를.


    야구에 대한 세 가지 슬픔   


    1

    세상엔 기본적인 룰을 어기는 사람들이 많다 야구를 하기 전엔 그런 작자들이 그렇게 많으리라곤 짐작도 못했다 배트를 들거나 글러브만 끼면 저절로 야구가 되는 줄 아는 놈들 그런 놈들일수록 야구는 제가 다 하는 양 방망이를 들고 나선다 고작 남의 집 유리창이나 깨는 주제에 말이다 야구를 제대로 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면 모두 줄행랑을 칠 놈들이다 그런 놈들은 야구에 룰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오히려 룰을 지키는 사람을 향해 룰을 어긴다고 손가락질한다 그것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룰이다 룰을 지키는 사람은 룰을 지키는 만큼 손가락질당한다 자신이 룰을 어기는 건 아닌지 혼란에 빠진다 외로움 때문에 룰을 버리게 된다 룰을 모르는 사람들의 룰을 따르게 된다 세상엔 룰을 지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2

    나만큼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 야구 얘기를 나누며 그를 쉽게 믿었다 선수들끼리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 야구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열고 최근에 구상한 타법을 털어놓았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순결한 타법이었다 그런데 그가 경기장에 나가 내가 얘기한 타법대로 야구를 한 것이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건 분명히 내 타법이었다 야구 때문에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내게서 야구 이상의 무엇을 훔쳐간 것이다 밤마다 누군가가 내 야구를 훔쳐가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야구를 다시 시작했을 때 내 야구는 수비력이 지나치게 향상돼 있었다 다신 그 누구도 꿈속에서조차 내 야구를 훔쳐갈 수 없었다 야구에 관한 한 그는 내게 커다란 선물을 한 것이다


    3

    방망이로 날려버리고 싶은 놈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왜 그런 놈들이 하나같이 나보다 큰 방망이를 들고 있는지 야구 세상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견딜 수 없이 많은 살의를 품으며 나는 둥글어진다 밤마다 나는 증오로 부푼 나를 멀리 날려보낸다 날려버리고 싶은 놈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야구를 전혀 몰랐던 시절의 아이 나를 닮은 작은 아이가 사는 곳 야구와는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는 어떤 이들이 있는 곳 야구에 관한 모든 상념이 잊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홈인이라 외친다


성미정, 『대머리와의 사랑』, 문학동네, 2020.


김소이 님께서 성미정 시 <야구처녀의 행복한 죽음>을 낭송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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