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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Jun 28. 2024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안현미 <거짓말을 타전하다>

   거짓말을 타전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안현미, 『곰곰』, 걷는사람, 2018.


과속방지턱 같은 문장이 있다.

그런 문장을 만나면 가슴이 덜컹한다. <거짓말을 타전하다>를 읽는 내내 가슴이 덜컹거렸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부터 시작해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에서 정점을 찍는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는 화자의 고백이 애잔하다.


<거짓말을 타전하다>는 도시 노동자의 가난과 고독, 비애를 이야기한다. 이 시에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벌레들"이 등장한다. 가난과 열악한 환경을 암시하는 벌레는 또 다른 뜻을 품고 있다. 안현미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벌레가 된 사내"는 카프카의 『변신』이라고 밝혔다. 카프카의 문학을 만나 시를 쓰는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안현미 시집 『곰곰』은 2006년에 출간됐고, 2011년, 2018년에 복간됐다. ‘곰곰’은 단군신화 속 웅녀를 지칭하는 '곰'을 겹쳐 쓴 제목이다. 여성으로 사는 삶에 관한 고민을 담은 표제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청년 클레어 님은 매거진 <보석 같은 작가님들을 소개합니다>에서 브런치 작가들과 교과서에 실린 110명의 작가를 소개하고 있다. 그중 산업화 시대의 도시 빈민과 노동자의 삶을 다룬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 글 두 편을 링크로 옮긴다.




거의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거짓말을 타전하다>의 메시지는 유효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고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다고 말하는 화자는 그가 처한 현실이 70년대와 닮아있음을 이야기한다. 60년대 이후 산업화로 인한 이촌향도, 도시의 거대화, 그에 따른 도시 빈민의 양산과 노동자의 인권 문제가 이어져 온 90년대가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다.


9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된 또 다른 사회 문제가 있다. 그 문제를 다룬 자작시를 한 편 적는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 같은


 그는 최고의 리튬배터리를 만들었다

 공장에서 성실하게 번 돈을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냈다

 함께 살날이 곧 오겠지

 의지가 활활 타오를 때

 리튬배터리도 활활 타올랐다

 소화기로 잡히지 않는 불길

 피할 곳을 찾지 못해 숨을 참았다

 그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

 최고의 리튬배터리는

 까맣게 타버린 그의 꿈을

 태우고 또 태웠다


지난 24일 경기도 화성시 리튬배터리 공장에서 폭발 사고로 23명이 숨졌다. 중국인 17명, 라오스인 1명, 한국인 5명으로 외국인 노동자가 다수였다. 외국인 노동자 모두 파견업체 소속 일용직이었다. 대피 훈련이나 안전교육을 받지 못했고 건물 내부 구조를 파악하지 못해 대피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한겨레)


외국인 노동자 유입은 노태우 정부 시절 실시된 ‘해외투자 기업연수생 제도’(1991년)와 ‘산업 연수생 제도’(1993년) 도입 이후 활발히 이루어졌다. 경제 호황으로 내수 시장이 급성장해 일자리가 많이 생기면서 노동 조건이 열악하고 임금이 낮은 3D 업종 기피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에 인력이 부족한 업체들은 대안으로 외국 인력을 적극 도입했다. 외국인 노동자 수가 증가하고 외국인 노동자 인권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2023년 12월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은 251만 명을 기록했다. (출처: 연합뉴스)


화성 공장 화재 참사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남편이 미국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한국 국적이니 외국인 노동자인 셈이다. 얼마 전 남편은 멕시코에 있는 공장으로 출장 갔다. 화성 공장 화재 뉴스를 보고 남편에게 연락해 공장 비상구 위치를 파악하도록 당부했다.


가족은 아니어도 가족 같은 마음으로 화성 공장 화재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애도의 뜻을 전한다.




소오생 님께서 <미싱 & 미싱 : 재봉틀과 미싱 사이>라는 글에서 60년대에 시작된 미싱 노동의 역사와 7, 80년대 여성 노동자의 고단한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다뤄주셨습니다. 노동자 인권에 관한 고민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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