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 <유랑>
나, 걸었지
모래 우에 발자국 남기며
길은 멀고도 먼 바다
목말라 퍼먹을 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
뒤를 돌아보았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 부를까
이미 지워진 발자국
되돌아갈 수 없었지
길 끝에는 새로운 길이 있다고
부스러기처럼 씨앗처럼 모래 흩날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
이제 혼자 걷고 있었지
깨어보니
무언가 집에 놓고 왔을까
이미 지워진 발자국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으며
목말라 퍼먹을 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
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을까
김성규,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창비, 2013.
흐르는 강물 따라 걸었네
길 끝에서 만난 바다
신발을 벗어두고 모랫길을 걸었지
뒤돌아보니 길은 까마득하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
조각배 하나 띄웠네
다시 여행이 시작되었지
한국에서의 시간은 미국에서의 시간보다 빨리 흐른다.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이곳의 일상은 평화롭다.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가끔 친구를 만나고, 책 읽고 글을 쓴다. 여름에 장맛비처럼 찾아오는 나를 반겨주는 가족과 친구가 있어 고향이 고향답다.
문학에 관심을 두다 보니 문학관을 찾게 된다. 강경 소금문학관, 논산 김홍신문학관, 부여 신동엽문학관에 이어 여행길에 경주 동리목월문학관, 옥천 정지용문학관에 들렀다. 불국사 근처에 있는 동리목월문학관 건물은 웅장한 멋이 있었다. 정지용생가 곁에 있는 정지용문학관은 단층이어서 소박한 느낌이었다. 다른 문학관들은 현대식 복층 건물로 문화공간의 기능을 강조한 것으로 보였다. 정지용문학관은 2005년, 동리목월문학관은 2006년, 신동엽문학관은 2013년, 김홍신문학관은 2019년, 소금문학관은 2021년에 개관했다.
여덟 명의 시인을 만났다. 인문학 강좌와 시 합평 수업을 듣고 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밀려있다. 미국에 가져갈 책이 쌓여간다. 유랑의 시간은 그렇게 채워지고 있다.
트루베르(Trouvere)는 시를 노래로 부르는 '음유시인'을 표방한 그룹이다. 지난 연재 글 <짝짓는 마음>에서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노래한 그룹으로 소개했다. 2007년에 활동을 시작한 트루베르는 2023년 12월 마지막 앨범을 발매하고 2024년 2월 마지막 콘서트를 끝으로 활동을 마무리했다. 의미 있는 작업을 한 트루베르를 기리며 <유랑>을 노래로 감상한다.
길 끝에 새로운 길이 펼쳐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