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경 Jul 12. 2024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신동엽 <담배연기처럼>

 담배연기처럼

 

 들길에 떠가는 담배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 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두레박질이여.

 

 사랑해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매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퍼 못다 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신동엽, 『한글문학』, 1966년 겨울호.


"신동엽문학관 가는 길에는 OO이 있다."


강경 버스 터미널에서 부여행 709번 버스를 탔다. 가는 길이 지루할까 봐 시집 한 권을 챙겼지만 푸릇푸릇한 논뷰, 산뷰에 시선을 뺏겨 책을 펼 겨를이 없었다. 버스에 같이 탄 아주머니가 중간에 내렸고 기사님과 나의 드라이브는 20여 분 계속됐다. 곧 눈에 들어온 왕릉뷰.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백제의 고도, 부여를 향하는 길에 부여 왕릉원이 있었다. 시내로 접어들자 정림사지 5층석탑이 보였다. 군민회관 앞 정류장에 내려 길을 건너면 부여 성당이 있고 그 옆으로 신동엽길이 이어진다. 유리 벽에 적힌 시들을 눈에 담고 신동엽 생가를 마당에 품은 신동엽문학관에 도착했다.


신동엽 생가 마루에 앉아 담소 나누는 사람들 옆을 지나 문학관 건물에 들어갔다. 방명록이 있는 곳에 기념 스탬프 두 개가 놓여있었다. 신동엽 시의 한 구절이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담배연기처럼>에서
"사양들 마시고 지나 오가시라
없는 듯 비워둔 나의 자리"
<나의 나>에서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껍데기는 가라>와 <금강>으로 유명한 참여 시인 신동엽(1930~1969)은 39세의 나이에 부인 인병선 여사와 2남 1녀를 남겨두고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담배연기처럼>에는 못다 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와 "아퍼 못다 한 어느 사내의 숨결"은 신동엽 시인이 세상을 일찍 떠날 것을 알고 쓴 표현인가 싶게 그의 삶과 가깝다. "멀리"에서 물리적 거리를 먼저 떠올렸지만 화자는 사랑하는 대상에 도달하지 못한 심리적 거리를 안타까워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살아서인지 <담배연기처럼>의 문장이 유독 가슴에 와닿았다. 아침을 거르는 게 속이 편해서 아침을 잘 안 먹는다. 그건 미국에 있을 때 얘기고, 여기서는 아침을 먹을 수밖에 없다. "엄마랑 밥을 이제는 얼마나 먹겠니" 하면서 아침밥을 챙겨주시는 엄마가 있어서다. 아이가 청강생으로 다니는 학교 등하교를 전담해 주시는 아빠가 있어서, 저녁 먹으라고 불러주는 동생이 있어서 나는 이리도 고향이 좋은 것이다. 나를 위해주는 가족이 여기 있어서.


강경에 비가 많이 내려 강이 범람했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천변에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쓰레기와 진흙을 보고 "안창에의 속상한 두레박질"을 경험했다.




신동엽의 연시(戀詩)를 한 편 더 옮긴다.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주는 머슴이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버리자.

 그리하여 싶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때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를 일일께며.


신동엽, 『꽃같이 그대 쓰러진』, 실천문학사, 1988.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은 헌신적인 사랑을 이야기 한다. 여운이 긴 작품이다.




<담배연기처럼>과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을 '신동엽손글씨체'로 감상할 수 있다.


부여군지역공동체활성화재단은 백제의 미학을 담은 부여 고유의 '정림사지체'와 신동엽 시인의 공동체 정신을 담은 '신동엽손글씨체'를 개발했다. 재단이 발행한 『시인 신동엽의 좋은 언어』(2023)에는 <담배연기처럼>과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을 포함해 부여 주민들에게 친근한 30편의 시와 3편의 산문이 실려있다. 시는 '신동엽손글씨체'로, 산문은 '정림사지체'로 쓰였다. (링크로 전자책이 잘 열리지 않아서 시 두 편을 하단에 이미지로 추가했습니다.)


신동엽문학관은 6월부터 8월까지 매주 목요일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으로 "21세기를 성찰하는 대지의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신동엽문학관과 신동엽 생가
신동엽손글씨체


이전 14화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