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민기 선생을 기리며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김민기, 앨범 <김민기>, 1971.
긴 밤 지새우고 대학 광장 잔디밭에 모여 앉아 민중가요를 부르던 때가 있었다. <아침 이슬> 다음 곡은 늘 노찾사의 <광야에서>였다. 광야에 가겠노라는 노랫말을 따라 광야의 노래를 불렀다.
그 시절 대학로에서 처음 본 공연이 <지하철 1호선>이었다. 오래전이라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침이슬>을 부르고 노찾사 앨범을 제작한 김민기가 연출한 공연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지난 21일 예술인 김민기가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미술가, 싱어송라이터, 공장 노동자, 소작농, 건설현장 노동자, 광부, 음반 제작자, 뮤지컬 연출자, '극단 학전' 대표 등 그가 거쳐온 직업과 직함이 많지만, 그는 자신을 '뒷것'이라고 불렀다. '앞것'인 배우와 가수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돕는 '뒷것'이기를 자처했다.
2024년 4월 21일부터 5월 5일까지 주 1회 방송된 <SBS스페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3부작은 여러 희귀 자료와 주변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을 다뤘다.
평소 그는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 인터뷰를 거부했지만, 몇몇 인터뷰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2015년 한겨레 인터뷰와 2018년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그의 진면모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의 시련일지라"
김민기는 "그의 시련일지라"에서 막혀 풀리지 않던 가사를 "나의 시련일지라"로 고치고 나서 <아침 이슬>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가 시대의 아픔을, 타인의 시련을 자신의 서러움으로 안고 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월호에 관한 노래를 만들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그러지 않곤 그 죽음을 묘사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죽음이 얼마나 끔찍한데…. 당사자만큼 절실하지 않으면, 그걸 묘사할 자격이 없다고 난 생각해.
세월호 이후에 어떤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보고 주제가를 만들어 달라고 했어. ‘야! 나 박정희가 시켜도 나 그런 거 안 했어. 왜 니들이 날 시켜?’ 그래놓고는 안쓰러워서 내가 고등학교 때 만든 ‘친구’라는 노래가 있으니 그걸 쓰라고 했지.
김민기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만들게 된 사연이다.
거기가 북평이었는데 지금은 동해시인가? 그때 난 고3이었는데 학교에서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이랑 야영을 갔다가 후배 하나가 죽었어. 그 사실을 후배 부모한테 알리려고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느낀 걸 노래로 만든 거야. 누가 그렇게 썼더라고. 1절하고 2절 가사가 뉘앙스가 너무 다르다고. 1절의 가사는 ‘검푸른 바닷가에…’ 어쩌고 서정적으로 가다가 2절은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이렇게 나간다고. 그 1절하고 2절의 간극이 뭐였냐면… 그 집행부 새끼들! 다 어른들이지.
너무 억울했어. 내가 만약에 후배 집으로 연락하러 오지 않았다면 난 그 어른들하고 붙들고 싸웠을 거야. 그 당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사진기자를 가리키며) 저 양반처럼 이렇게 찍은 거야. 그걸 제품이라고 만든 게 아냐. 차고 넘쳐서 흘러나오는 흔적이 그림이 되고 노래가 된 거지.”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른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고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눈앞에 떠오른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고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김민기, 앨범 <김민기>, 1971.
"돈이 안 돼도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은 해야 된다"
2008년 김민기는 돈이 되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접고 청소년극, 아동극을 무대에 올렸다. 그의 오랜 꿈이었다. 돈만 벌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 할 거 같다며 결단을 내렸다.
그는 세상에 돈 되는 일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을 여의고 조산원(산파)으로 일하며 10남매를 키웠다. 다음은 그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제일 무서운 게 문둥이하고 팔다리 잘린 상이군인들이었다. 근데 방학이면 서울에 있는 형, 누나들이 온다고 해서 역에 마중 나가는데, 역에서 그 무시무시한 문둥이들이 우릴 보고 막 다가오는 거야. 굉장히 무서웠다. 근데 그놈들이 어머니한테 인사를 굽실하고… 알고 보니 어머니가 일정 때부터 받아준 놈들이야. 어머니가 그 사람들한테 돈을 받았겠어? 내 말은 세상에 돈 되는 일만 다가 아니다 이거지. 그 전쟁통에 그 아이들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거야? 돈이 안 돼도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은 해야 된다. 내가 아동극을 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김민기는 80년대부터 아이들을 위해 여러 작품을 썼다. 80년대 탄광촌 아이들의 학급문집에서 "쓰껌헌 탄가루로 화장"한 아버지 얼굴이 예쁘다고 한 시를 음반 <아빠 얼굴 예쁘네요>(1987)로 냈고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영상 노래극으로 무대에 올렸다. 그 학급문집을 엮은 이는 임길택(1952~1997) 선생이다. 두 사람이 겹쳐 보이는 이유다.
1991년 3월 개관해 2024년 3월 폐관한 소극장 학전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장기 임차해 지난 7월 17일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연장 '아르코꿈밭극장'으로 개관했다.
서러운 사람들, 아이들과 늘 함께했던 아름다운 사람
故 김민기(1951~2024) 선생을 기린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김민기, 앨범 <김민기 1>,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