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봉우리>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 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 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고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에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김민기, 앨범 <김민기 4>, 1993.
<봉우리>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해 조기 귀국한 선수들의 이야기를 다룬 MBC 다큐멘터리의 주제곡으로 김민기가 만든 노래다. 1985년 양희은이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이라는 제목으로 불렀고, 1993년 김민기가 불러서 '학전'의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한 앨범에 실었다.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에 올림픽이 있다 보니 올림픽 시즌이면 <봉우리>가 생각난다.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는 선수들의 경기가 아니라 개막식 축하 공연에서 <봉우리>를 떠올렸다. 셀린 디온의 무대였다.
<사랑의 찬가> 그리고 <봉우리>
캐나다 가수 셀린 디온이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사랑의 찬가>를 불렀다. 투병 중에 보여준 기적 같은 무대였다.
셀린 디온은 2022년 12월 희귀 질환으로 투병 중임을 알리고 다음 해 공연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그녀가 앓고 있는 '강직인간증후군'은 100만 명 중 한 명꼴로 걸리는 자가면역 신경근육질환이다. 근육이 경직되어 몸이 뻣뻣해지고 청각과 촉각, 감정적 자극이 경련과 발작을 일으킨다. 성대 근육도 굳어 노래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지난 6월 공개된 아마존 프라임 다큐멘터리 <I Am: Celine Dion>은 그녀가 강직인간증후군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여러 날에 걸쳐 노래 녹음을 마친 뒤 기뻐서 흥분하자 온몸이 뒤틀리고 뻣뻣해지는 근육 경련이 일어난다. 뇌가 자극을 받아서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노래를 마음껏 할 수 없어 슬퍼한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달릴 수 없으면 걷고, 걸을 수 없으면 기어가더라도 멈추지 않겠다(If I can't run, I'll walk. If I can't walk, I'll crawl. I won't stop.)"라고 말하며 노래를 향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If you can't fly then run, if you can't run then walk, if you can't walk then crawl, but whatever you do you have to keep moving forward." - Martin Luther King, JR.
"날 수 없으면 뛰고, 뛸 수 없으면 걷고, 걸을 수 없으면 기어가더라도, 무엇을 하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그녀가 다시 무대에 서기 위해 감내했을 고통, 땀과 눈물이 <사랑의 찬가>에 녹아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라고 노래한 그녀의 '당신'은 '노래'다. 수많은 봉우리에 올라섰던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하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일상일 것이다.
화려한 무대 위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