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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Jul 19. 2024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차도하 <침착하게 사랑하기>

 침착하게 사랑하기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차도하,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침착하게 살아내지 그랬어

 말은 쉽고 가볍지


 가벼운 말이 각을 잃고 

 찻잔에 쏟아졌다


 뜨거운 커피를 저을 때

 찻잔 속이 시커먼 강물 같았다


 무거운 천 같은 강을 두르고 맞으면 

 아파도 멍들지 않는다던 네 말이 

 나를 세게 때린다


 퍼렇게 멍든 말은 

 어둠이 내려앉듯 

 서서히 찻잔 속에 잠겼다


 침착하게 표면을 바라보았으나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침착하게 사랑하기>에서 '신'은 신처럼 군림하려는 자, 관계의 절대성을 의미한다. 데이트폭력과 가스라이팅의 정황으로 보인다. 


작년 10월 시 합평 수업에서 <침착하게 사랑하기>를 읽었다. 그즈음 차도하 시인이 세상을 등졌다는 걸 올해 초에 알게 됐다.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시 한 편으로 알게 된 시인이었지만 지인을 잃은 것 같은 충격이 있었다. 꽃 같은 나이 스물넷에 세상을 떠났기에 더더욱.  


차도하 시인은 1999년생이다. 대학 재학 중 스물한 살에 <침착하게 사랑하기>로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심사위원들은 작품에 관해 이렇게 평했다.

작은 세계를 말하려는 듯한 제목과는 달리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용기가 돋보였다. 천진해 보이는 어투가 단단한 세계를 뒷받침하고, 너른 시선이 가벼운 문체를 단속했다. 무엇보다도 기성 시인 누구도 쉽게 떠올릴 수 없게 한 개성의 충만함이 눈부셨다. (심사평 일부)


차도하 시인은 등단 후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와 관련된 출판사가 담당한 신춘문예 당선 시집에 작품 수록을 거부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이듬해 산문집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2021)을 펴냈다. 제목과 달리 솔직한 고백이 담겨있다. "폭력으로 점철된 유년", "동성연애를 향한 무심한 비난", "죽음을 결심한 어느 밤의 기억" 등의 이야기를 다뤘다. 


최근에 차도하 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 『미래의 손』이 출간됐다. 북토크를 할 수 없는 시인을 대신해 동료 시인들이 시집 낭독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차도하 시인은 늘 죽음에 관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의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서도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기운이 나지 않아 바닥에 붙어있을 땐 나를 저주하는 사물들과 나를 응원하는 사물들이 싸우는 상상을 한다. 이 생각을 할 땐 늘 나를 저주하는 진영이 우세한 형상인데, 사실 승패는 나에게 달렸다. 내가 기운을 내면 나를 응원하는 사물들이 이기니까. 그럼 기운을 내어 잠을 자거나 수업을 들으러 간다.

이렇게 겨우 힘을 내어 살면 무엇이 되는 걸까. 무엇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아서 죽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비웃음 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죽기엔 아깝다. 글을 잘 쓰니까. 글을 잘 써서 발표도 하고 책도 내고 어린 내가 그걸 읽고 오래 간직하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자유니까. 누가 이걸 하나하나 뜯어보며 아니라고, 그게 죽지 못할 이유는 못 된다고 따져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살 거니까.

시 당선 소감을 써야 하는데 죽느냐 사느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나에겐 이게 비슷한 이야기인가보다. 사실, 시는 그냥 뜯어 쓰는 마스킹 테이프일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시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이든 쓸 거라는 말이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도 싶지만 나는 이름을 안 믿기 때문에 이렇게 쓴다. 저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수업 듣고, 책과 술, 밥을 사주고, 바다에, 놀이공원에 놀러가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내 옷, 내 양말, 노래 취향에 영향을 끼친 분들 감사합니다. 내가 힘들 때 쪽지를 전해준 친구 고맙습니다. 요즘은 어떻냐고 넌지시 물어봐주어서 고맙습니다. 내 시를 꼼꼼히 읽고 어떤 부분이 좋은지 어떤 부분이 아쉬운지 말해준 사람들 고맙습니다.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양이를 사랑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중년 여성에게도 감사합니다.

잘 살고 잘 쓰겠습니다. 다 쓰고 나니 둘은 다른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둘 다 잘해내고 싶습니다. 


차도하 시인은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 출판사 '봄날의책'에 60여 편의 시를 투고했다. 출간을 준비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시집을 여는 첫 시로 선정한 <입국심사>에 그녀는 "천국에 갈 것"이라고 썼다. 시 전문을 옮긴다.


 입국 심사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


 살아가며 했던 모든 말이 적힌 책을 찢어 파쇄기에 넣는다. 나풀나풀 얇은 가루가 된 종이를 뭉쳐 날개를 만든다. 날개를 달면 거기 적혔던 모든 말을 잊어버린다. 

 날고 싶은 방향으로 날아간다.


 그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사람들은 천사를 보았다 말하겠지만

 천국의 주민들은 천사라는 단어를 모른다. 

 그것은 깃털의 일부가 되었을 따름이고 다른 단어와 같은 무게를 지녔다.


 때로는 아무것도 버릴 게 없는 경우도 있다. 가진 게 없거나 이미 버리고 온 사람들. 

 울지 않는 아기. 비쩍 마른 노인. 머리가 산발이 된 여자.

 버릴 게 생기면 다시 오세요.

 천국은 그들의 머리를 떼어 지상으로 힘껏 던진다.

 

 비가 오려나.

 어떤 사람이 물방울을 맞았다.

 그날 비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한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

 

 물방울을 맞은 사람이 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오늘의 구름은 양떼구름

 외국에서는 물고기의 비늘이라고 부른다.


 그래, 천국에서는 하늘과 초원과 바다가 섞여 있지만

 그래도 양과 물고기는 있다.


 양몰이 개와 그물은 없다.


차도하,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천국으로 이주한 시인이 떠나기 전에 남겨준 선물 같은 시집을 편다.

그곳에서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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