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vs 일상
“이혼, 돌싱, 퇴사, 이민, 여행“
최근 브런치스토리 인기 글들의 주요 주제이다.
일상이 아닌 일탈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어찌 보면(기존관념으로 보면),
‘인생실패’와 같아 보이는 주제의 글이 많고,
그러한 글들이 대중의 인기를 끈다.
우리의 사회상,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탈이란, 일상을 벗어남을 의미한다.
탈선이란, 정해진 궤도를 벗어남을 말한다.
열차가 정해진 선로를 벗어난다.
出轨, 중국어에서의 탈선은 ‘바람=불륜’을 뜻한다.
우리의 일상은 평범하다.
평범함은 매력이 없다.
따라서 평범함은 주목받지 못한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만족을 누리기가 어렵다.
평범한 일상의 반복은 권태에 이르게 된다.
처음의 달콤함은 쉽게 맛을 읽고 건조해지며,
우리는 특별한 경험을 찾게 되고,
평범하지 않은 삶을 모색하게 된다.
여행객이 바라보는 도시와
원주민이 바라보는 도시의
느낌은 매우 많이 다르다.
어린 시절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물론 객관적인 시간은 정확하게 흐른다)
새로운 정보를 저장하는 우리의 뇌가,
그리고 익숙한 정보를 스킵하는 우리의 뇌가
시간을 왜곡하게 느끼도록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일탈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반면 반복적인 우리의 일상은 순간처럼 지나간다.
TV에도, 유튜브에도 유독 여행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많은 것은, 현대인의 일탈의 욕망을 반영한 것일까?
일상의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는 일들,
그러한 일들에 대한 글들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건
우리 안에 감추어진 일탈의 본성일까?
마치 꾹~눌린 용수철이 강한 탄성으로 튀어 오르듯.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르 듯.
궤도의 강요, 평범함의 강요, 일상의 강요로 인해
억눌린 욕망들이 일탈로 표출되는 듯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한국의 속담과
이로 인한 순응의 일상은,
일탈이라는 반작용의 탄성을 갖게 한다.
한국의 술문화는 일탈 욕구를 반영한다.
네모반듯한 근무시간의 갑갑함을 보상받듯,
직장인은 퇴근 후에 술을 매개체로 일탈을 시도한다.
그러나,
일탈의 생활이 익숙해지면, 그 또한 일상이 된다.
일탈의 중독은 마치 마약의 중독과 같다.
점점 더 강도 높은 약효과(강한 자극)를 찾게 된다.
인생에서 궁극적인 일탈은 ‘주동적 죽음’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궤도는 ‘생존(살아있는 것,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일탈, 나의 주동적인 의지로 할 수 있는 궁극적인 일탈은 생존의 거부인 죽음이다.
(다만, 사후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기에, 죽음 이후에도 일상이 다시 반복될는지는 알 수 없다.)
일탈의 달콤함, 일탈의 유혹에 빠진 자는
궁극적 일탈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만족함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탈의 본성을 길들이자.
일탈의 맛을 최대한 천천히, 느리게 맛보자.
특별함이 일상으로 변화하는 흐름을 늦추자.
평범함에 소소한 재미와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여,
일상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도록 하자.
우리의 일상은,
어쩌면 남들이 꿈꾸는 삶일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은,
어쩌면 어제의 내가 꿈꾸던 삶일 수도 있다.
본성의 만족을 위한 순간의 일탈과 그로 인한 쾌감도 물론 좋겠으나,
평범함의 만족을 깨우친 사람의 평범한 행복이 더 오래갈 수도 있다.
자신이 짧고 굵게 살겠다면, 할 말 없으나,
가늘고 길게 사는 것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
어차피 쾌감과 행복은 객관+주관적인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일탈을 시도하는 것과 동시에,
주관적인 부분을 위한 노력(습관 양성)도 필요하다.
일탈을 경험한 이들이 새로운 일상에서도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日常에서도 소소한 쾌락을 발견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