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 작업은 마치 퍼즐 맞추기 같았다. 영상을 기준으로 각각 알맞은 자리에 소리라는 조각을 하나하나
찾아서 넣었다가 다시 빼기도 하고, 이 작업을 반복하면 어느새 작품이 완성되어 있는 점이 그랬다.
인물이 많이 나올수록, 장르가 SF 인지, 누아르 인지 등에 따라 영상이란 퍼즐에 필요한 소리 조각들은
더 많아지고 다양해진다. 첫 작품 작업의 감동에 젖어있는 것도 잠시 이번엔 드라마와 정반대의 작품이
날 반겼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걸어 나오는, 담배와 술이 난무하는,누아르 영화였던 것이다.
녹음을 하기 전 폴리아티스트는 나에게 "녹음실엔 낡은 구두밖에 없으니 좋은 새 신발을 사야 한다."했다.
처음엔 ‘폴리아티스트가 좋은 신발을 갖고 싶어서 이참에 사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떠올려보면 건달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검은 양복에 반짝거리는 구두였기에 이내 폴리아티스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화점에 도착한 우린 다양한 브랜드와 제품 사이를 오가며 좋은 소리가 나는 구두를 골라야 했다.
“어떤 신발이 편한가요?”라는 말 대신 “어떤 신발이 소리가 잘나나요? “라는 다소 특이한(?) 질문 던지면서.
하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백화점에서 구두를 신고 걷는 소리는커녕
폴리아티스트가 나에게 말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여러 매장을 돌고 돌다 우린 결국 타협하기로 했다. 아티스트가 신기 편하면서 적당한 높이의 굽이 있고 앞이 뾰족한 검정 구두로 말이다.
반신반의하며 사온 구두는 다행히 영상 속 주인공의 발과 잘 어울렸다.
다만 새 신발이라 '예쁜 ‘ 소리의 뚜벅뚜벅'이 아닌 '찌그덕'한 소리가 거슬렸던
폴리아티스트는 굽의 ’ 자연스러운 갈림을‘ 위해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에 구두를 신고선 퇴근을 알렸다.
언발란스한 선배의 퇴근 룩을 보며 웃음이 났지만 소리에 대한 선배의 열정 때문인지 멀어지는 진지한 구두소리는 전혀 우습지 않았다.
누아르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소리가 있는데 바로 담배이다. 생각해 보면 난 담배와의 접점이 없었다.
관심이 없으니 만질 일도 자세히 구경할 일도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생각해 보면 성인이 되어
시작했던 아르바이트 장소인 편의점에서도 담배를 팔지 않았으니 더욱 담배와 친해지는 일은 드물었다.
그렇게 계속 안 보고 사나 보다 했더니 웬걸 폴리작업할 때 그동안 보지 않았던 담배를 몰아보는 일명
‘담배 정주행’이 시작됐다. 폴리아티스트도 나와 같은 비흡연자이기에 실장님을 폴리 부스로 모셔놓고
담배에 관련된 소리를 녹음했다. 자그마한 담배에서 어찌나 다양한 소리가 나는지
작은 담배를 잡을 때 틱 하는 소리도, 불을 붙이고 머금을 때 타들어가는 소리의 타이밍도, 담배를 입에서 뺄 때 ‘뽁’하는 소리도. 실질적으로 담배를 태우진 않았지만 소리로 담배를 배우게 된 신박한 경험을 했다.
담배녹음은 연기와 냄새라는 후폭풍이 거세서 밀폐된 녹음부스에선 쥐약이다.담배 신이 나올 때마다
흡연을 할 수 없으니 녹음한 그때의 담배소리를 샘플로 만들어 아직까지 잘 사용 중이다.
누아르 영화는 장르 특성상 다른 장르보다 물건을 부시고 던지고 싸우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신의 리얼함을 좀 더 잘 살리기 위해 실제 그릇을 깨트리는 소리를 녹음해 달라는
실장님의 요청이 있었다.(보통은 사운드 라이브러리 소스를 이용한다)
폴리아티스트는 "우리가 가진 그릇은 이게 다라며 녹음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라고 당부하며
폴리룸에 있는 모든 접시를 와장창 깨트리기 시작했다. 하나둘 깨지는 소리가 공간을 채워나가고
폴리룸 살림살이가 남아나지 않겠다고 생각할 즈음 녹음은 끝났다. 모든 게 전반적으로 순조로웠다.
그다음 날 마주한 텅 빈 오디오 파일을 마주하기 전까진 말이다.
처음엔 선배의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다 정말 그릇깨는 소리파일만, 딱 그것만 없어졌으니까.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비어있는 오디오 화면을 살리기 위해 인터넷도 뒤져보고 백업파일도 열어봤지만
끝내 파일을 복구할 수 없었다. 이때 당시 작업 기간이 타이트했던 터라 당장 다시 녹음을 진행해야 했는데
주변 상점은 문을 다 닫았고(그때 시간 밤 11시) 폴리부스에 그릇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집에서 안 쓰는 접시라도 총 동원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우릴 지켜보던 실장님은 '양재 하나로마트'는 24시간 영업이라는 말과 덧붙여 다이소매장도 있다는 희망찬 말로 폴리팀을 위로했다.
우린 부랴부랴 실장님 차를 얻어 타고 마트로 향했다. 디자인 상관없이 최대한 싸고 다양한 그릇들을 카트에 가득 담고 돌아와 그릇을 깨트렸다. 저장 버튼을 평소보다 몇 번이나 눌렀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실장님이 원하는 생생하게 싸우는 소리(접시 깨지는 소리)는 납품일자에 맞춰 완성이 되었고 작품 안에서 생생하게 맞아 들어갔다.
소리도 냄새와 마찬가지로 기억의 일부인듯하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면
그때의 느낌이 순간 생생하게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일 것이다.
tv에서 종종 작업한 영화를 마주친다. 어떤 작품이든 잠깐 리모컨을 멈추며 그때의 기억을 곱씹어보다 채널을 다시 돌리곤 하는데 유난히 더 오래 머무는 작품이 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누아르 영화다.
특히나 싸우는 장면에서 접시 깨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릴 때면 난 더 멈칫하게 되는데
빈 공간으로 남았던 파일의 안부가 궁금해서 일수도, 부랴부랴 접시를 사 와 잽싸게 깨트렸던
다급한 순간이 생각나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만든 소리샘플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다른 영상에서 아직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아 지울 법도 하지만 쉽사리 지우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접시 깨지는 소리뿐만 아니라 그 샘플 소리 안에는 폴리팀의 다급함 , 초조함 , 억울함 , 어이없음 , 등등의
다양한 감정이 같이 들어있는 추억상자 같기 때문이다.
혹시나 누아르 영화를 보다가 그릇이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면 조금은 반가워해주길, 그리고 그 소리가 영상 속 감정과 맞물려 당신들에게도 잘 전달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