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 작업에 들어가기 전 공통적으로 하는 일이 있는데 첫 번째는 스팟팅이다.
감독님과 사운드팀의 회의라고 이해하면 쉽다.
작품에 들어갈 전체적인 소리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영상 위에 소리가 어떤 식으로
입혀지면 좋을지 등의 틀을 잡아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전반적으로 "발소리가 묵직했으면 좋겠다."
"고래 울음소리를 특별히 신경 써달라." 같은 것들이다.
두 번째는 폴리팀 내에서의 사운드 회의이다. 작업할 영상을 보면서 녹음 시 필요한 물품목록을
정리하고 (폴리부스에 없는 물건들은 제작부에 따로 요청해야 한다.)
폴리 녹음은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정하며 감독님이 요청한 포인트는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 등을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각각의 회의를 마치고 본격적인 녹음의 시작이었다. 내가 처음 작업하게 될 영화는 <완전 소중한 사랑>
(감독 김진민 / 주연 심이영 임지규)였다.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과거 소아암을 앓았던 남자주인공과
과거 가수였던 여주인공이 만나 일어나는 일들을 그려낸 작품이다.
작업 전 몇 번이나 봤던 영상이었는데 녹음직전 마주한 영상은 새 학기가 시작된 학급에 들어찬 공기처럼
무척이나 어색하다.
난생처음 해보는 폴리녹음이기에 신 (scene) 별로 영상을 보며 진행됐다. 선배가 질문한다.
“여기서 뭐 녹음해야 해?”
“네?” 나는 당황했다.
영상이 물에 녹은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내 눈앞을 휙 지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화를 볼 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한 신(Scene), 그러니까 1-5분의 시간 속에서 주인공들은
걷고 뛰는 것은 물론 생각보다 많은 물건을 만지고 행동하고 있었다.
영상 앞에 멍하니 있는 나를 보며 선배는 익숙하다는 듯
“여기 주인공 옷소리랑 발소리, 핸드폰, 가방, 사진 해야지. ”라고 차분히 알린다.
몇 초 안 되는 장면을 캐치한 선배에 한번 놀랐고 영상 속 주인공들이 하는 행동의 대부분이
폴리라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폴리는 군데군데 필요한 부분에만 넣는 것이었는데
‘내가 진짜 프로의 세계에 왔구나’를 실감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동시소스(현장에서 녹음된 소리)엔 발소리와 물건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현장에선 배우들의 대사 위주로 녹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옷소리를 녹음했다. 마이크에 가까이한 옷소리는 먼 곳에서 들리는 바닷소리처럼 슥슥 거리기 시작한다.
물건소리도 녹음한다. 주인공이 핸드폰을 닫고 내려놓으면 폴리아티스트도 똑같이 핸드폰을 닫고
내려놓는다. 전화기 소리가 맘에 들지 않는지 몇 번을 내려놓고 닫기를 반복한다.
핸드폰 소리로 쌓인 트랙이 10개에 가까워진다. 그렇게 만든 소리들이 모이고 모여 영화 속 수많은 장면들
하나하나에 채워지고 자리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영화 '사운드 믹싱' (대사 효과 음악을 합쳐 완성하는 일)이 끝나고 감독님과 함께
작품을 보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녹음했던 소리들이 영상에 은은하게 스며들어갈 때의 기분 좋은 느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영화관에 갈 때면 늘 나의 귓가를 톡톡 두드리는 몇 가지 소리가 있었는데 가령 종이 펼치는 소리, 글 쓰는 소리, 사진 넘기는 소리 같은 것들이 그랬다.
생각해 보면 난 폴리녹음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일 뿐 내가 좋아한 소리들은 모두 폴리였다는 것을
폴리는 늘 나의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그때 난 알게 되었다.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수많은 이름 사이로 내 이름 세 글자만 유독 크고 진하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일 테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영화 개봉땐 폴리팀 자체가 크레디트에서 누락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처음 작업한 작품이기에 첫 크레디트이기에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한가득 이었지만
스스로 괜찮다 위로하며 달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내 이름이 작품과 함께하지 못했지만 <완전 소중한 사랑>은 늘 나의 공식적 첫 영화다. 폴리가 영상 속에서도 그리고 나에게도 완전 소중하다고 알려 준 나만의 첫 작품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