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완성된 무언가 보다 날것이 주는 어떠한 매력이 더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도 좋지만, 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접하는 가공되지 않는 순간들,
예를 들면 조리되지 않은 재료들이 내어주는 날것의 냄새들,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그러하다.
사랑하는 반려견과의 산책 시 위풍당당한 멋진 모습도 좋지만, 같이 사는 내게만 보여주는 베개에 눌려
찌그러진 모습과 잠에 취해 추-욱 늘어진 몸의 따뜻한 온도, 꼬랑꼬랑한 털냄새를 풍길 때의 날것을 난 더 좋아한다.(사실 반려견의 어떤 모습이든 다 좋다. 그중에서 굳이 뽑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폴리작업을 할 때도 날것 느낌이 물씬 나는 영상으로 작업을 하게 된다. 가령 CG 효과가 입혀지지 않았다던가, 영상편집이 진행 중인 가편집본 같은 것들이 그렇다. 가공이 덜된 영상을 들여다보고 작업하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은 나에게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내 스스로가 만들어낸 영상에 대한 신비주의가 허물어지는 것이 실망스러워 자꾸만 밀어내다 보니 완성된 영상을 보고 감탄하는 일은 점점 멀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마냥 내가 가진 것을 미워하고 밀어내기만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상 옆 내가 가졌던 신비감을 포기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예상보다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성된 영상에서 볼 수 없는 스태프들의 노고와 배우들의 타오르는 열정이 그랬고 개봉 및 공개되지 않은 작품을 본다는 것은 예상보다 이 직업이 가진 큰 특권이었다. 남들이 궁금해하는 영상을 누구보다 빠르고 심지어 한 번만 보는 것도 아닌 여러 번 접하는 일은 내겐 익숙하지만 절대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날 것'이라는 무언가를 이해하고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내 마음도 편해졌다.
어느 날 실장님이 급하게 폴리 부스에 들어와 미션을 하나 주었다. 이번엔 어떠한 ‘날것’ 인가하고 들여다보니 어느 가수 뮤직비디오 앞장면에 소리를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뮤직비디오 내용을 이러하다. 한 남자가 걸어 나온다. 옛날에 볼 수 있을법한 쇠 재질의 필름통에서 긴 필름을 꺼낸다. 필름을 잘라내고 영사기에 넣는다.
늘 영화나 드라마 작업을 하다 처음 해보는 뮤직비디오 작업에 설레기 시작했다. 공개되지 않는 음원을 듣고 뮤직비디오를 작업하는 일은 꽤나 매력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폴리아티스트와 나는 싸인 시디를 받아달라는 말을 연신 해대며 실장님을 괴롭혔고 반복되는 우리의 말에 지친 실장님은 알았다고 말하며 폴리부스를 떠났다.
없는 게 없는 만물상 같은 폴리부스 지만 꼭 중요한 순간에 없는 물건이 있다. 대체할 수 없는 본연의 소리를 내는 몇 가지 물건이 있는데 카메라 필름이 그런 예시이다. 필름을 구해오라는 폴리아티스트의 말에 한번 들었는데도 귀에서 맴도는 어느 가수의 신곡을 흥얼흥얼 거리며(나만 들을 수 있게 작게 불렀다. 잘못하면 스포일러가 된다.) 밖으로 나갔다.
처음에 들른 곳은 회사 앞 문방구 였다. 다양한 문구와 사무용품을 파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라 당연히 카메라 필름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사장님께 가볍게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어요.”였다. 그렇다. 원래 늘 찾는 물건은 쉽게 구해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 여긴 없을 수도 있지. 사무용품 파는 데니까 필름은 안 가져다 놓았을 거야.’라고 빠른 생각 정정과 함께 조금 많이 떨어진 대형마트로 갔다.
‘대형마트는 좀 다르지 않을까’라는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 장담했던 나의 태도와 다르게 꼭꼭 숨은 필름은 나를 술래로 만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이야 아날로그 감성을 그리워하는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다시 필름카메라와 캠코더 등이 유행이라 파는 곳이 다양해졌지만 (종종 길을 걷다 보면 필름 자판기가 보이기도 하는데 늘 필름자판기를 볼 때마다 이때 생각이 난다.) 그때만 해도 기술 좋은 디지털카메라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인터넷 말고는 카메라 필름이 슬슬 사라지는 추세였던 것이다.
예상보다 넓어지는 반경에 슬슬 차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고 단순하게 머리를 굴렸다. 오히려 편의점에 있지 않을까,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니 많은 종류의 물건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근처 편의점 도장 깨기를 시작했다. 평소에 늘 내 근처에 있던 편의점도 오늘따라 잘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필름을 찾아보지만 사장님은 “없어요. 요즘 누가 그런 걸 찾아요.” 라며 당연하다는 듯 익숙하게 말했다. 주변 편의점을 다 돌아봤지만 결국 필름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 보니 괜히 나의 상상 속 어딘가에 필름이 있었던 거 같기도 없었던 거 같기도 하는 헷갈리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물건은 찾으면 없다. 이번뿐만 아니라 내 방에서도 뭔가 찾을 때도 찾기를 포기하면 나와버리는 게 찾는 물건이다. 포기하는 마음을 가지면 필름을 구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상점 반경을 조금 더 넓혔다. 조그마한 사진관이 눈에 띄었다. '사진을 다루는 곳이니까 필름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성큼성큼 걸었다. 이번엔 느낌이 좋았다. 사진관이니까. 사진 하면 필름 아닐까?라는 나의 생각은 틀렸다. 필름을 찾는 내게 사진관 사장님은 요즘은 필름 인화하는 곳도 줄었고 자신도 디지털로 작업한다며 내게 카메라를 보여주며 웃었다. 희망을 가졌던 사진관을 나서는 난 ‘마치 오디션에서 몇 번이고 떨어진 느낌이 이런 걸까, 비교도 안 되겠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아.’라고 곱씹으며 터벅터벅 걸었다. 그 후에도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없어요.” 가 몇 번이고 반복되고 난 뮤직비디오 속 흘러나온 가사처럼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지 모른 채로 길을 걷다 보니 회사와 멀리 떨어진 동네까지 와버렸다.
주변엔 높은 빌딩과 지나가는 차들이 가득할 뿐 필름이 팔 것 같은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냈다 넣었다 를 반복했다. 실장님과 폴리아티스트에게 오프라인엔 도저히 필름 파는 곳이 없으니 하루만 더 시간을 달라는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며 고개를 들던 그때, 빌딩 창문 2층인가 3층에 크게 이름이 붙어있는 체인 문구점이 보였다. 앞선 문구점에서 실패한 전적이 “가지 말까.”라고 날 붙잡았지만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이 날 문구점 입구로 이끌었다. 기대 없이 문구점 사장님께 “카메라 필름이 있을까요?”라고조심히 물었다. 사장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있어요.”라고 대답하곤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누가 찾을까 봐 안 치웠는데 하나 드려요?”라고. 혹시 누가 찾을까 봐 안 치웠다는 사장님의 말은 그 당시 내가 들었던 어떠한 말 보다 다정하고 따뜻했다. 혹시 모를 우연한 사장님의 배려가 내 마음속 안도감 옆으로 따스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사장님이 건네준 필름 상자를 흔들어보았다. 네모난 상자에 플라스틱 필름이 부딪히며 내는 “탁” “탁” 하는 소리가 평소보다 가볍고 경쾌했다. 뮤직비디오 속 가사를 다시 흥얼거리며 회사로 돌아가는 길, 먼 거리를 헤매 힘들게 만난 카메라 필름은 뮤직비디오 속 노랫말과 닮아 있었다.
필름을 구해오는 것과 달리 녹음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필름 통 속 얇은 플라스틱 소리가 타닥타닥 거리며 소리를 채워나가고 뮤직비디오는 음악, 영상과 더불어 소리라는 예쁜 옷을 입었다. 아쉽게도 실장님께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결국 아티스트의 사인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구해온 필름이 뮤직비디오 속 소리의 한 조각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면 그걸로 되었다. 그리고 이미 난 충분히 받았다.
공개되지 않은 음원을 미리 들은 것, 준비성 철저한 사장님의 배려,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필름소리는
내가 받고 싶었던 아티스트의 사인만큼이나 값졌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