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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나 Apr 26. 2023

거대한 해적선에 탑승하다.

폴리아티스트의 직업체험은 끝이 없다. 하루는 의사가 되었다가 또 어느 날은 화가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군인이 되어있으니 말이다. 어떤 직업이 제일 맘에 드냐 는 나의 질문에 폴리아티스트는 역할마다 각자의 고충이 있다며 진지하게 역할에 임한다.


변화무쌍 한 폴리아티스트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폴리부스는 폴리아티스트가 요리사가 되는 날엔 한쪽의 공간이 작은 주방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경찰이 되는 날엔 수갑, 명찰, 노트북이 모여 작은 파출소가 만들어진다. 만능 공간인 폴리 부스에서는 다양한 소리들이 생겨나고 흩어지지만, 모든 소리가 폴리 부스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아스팔트 바닥부터 거대한 우주선, 깊은 바다를 건너는 배 등이 그 예시다.


겹겹이 쌓아 올린 실제 아스팔트와 달리 실내에 간이로 만든 폴리부스 아스팔트 바닥은 텅텅거리며 먹먹한 소리를 낼 때가 있다. 전에 언급했듯 우리의 미션은 ‘가짜지만 진짜 같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좋은 소리’를 만드는 것인데 이러 다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우주선이나 배는 보이는 면적만큼이나 공간감도 크다. 그에 비해 한없이 작은 폴리 부스에서 베테랑 폴리아티스트가 온 힘을 다해 만든 소리는 마치 티라노사우루스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한 것처럼 정성을 다했지만 티가 나지 않는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폴리 부스가 아닌 실제 장소에서 녹음을 진행하는데

우린 이것을 ‘로케이션’이라고 부른다.


로케이션을 할 때는 폴리팀 만의 암묵적인 룰이 존재하는데

첫째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진행하는 것이다.

마이크의 수음 능력이 워낙 뛰어나 사람들이 붐비는 곳과 사람들이 활동하는 낮 시간은 녹음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람들이 잠들어있는 새벽에 대부분 로케이션이 진행되는데 차가 자주 다니는 도로, 생활소음이 나는 주택가, 개 짖는 소리가 나는 아파트 등은 피하는 것이 좋다.

두 번째는 비가 내린 직후와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은 녹음이 불가능하다.

땅이 젖어 있거나 강풍이 부는 날이면 본연의 소리를 녹음할 수 없기에 날씨, 특히 새벽의 날씨는 로케이션에 앞서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그렇기에 일기예보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모습은 소풍을 하루 앞둔 어린아이 모습 같기도 하다. 그때보단 훌쩍 커버린 몸이지만 말이다.






로케이션을 갈 때마다 함께 하는 폴리팀 만의 반려 동물이 있다. 복슬복슬한 털로 덮인 ‘윈드실드’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 무심코 보면 삽살개 같아서 폴리아티스트는 늘 그것을 ‘개털’이라고 불렀다. 소위 ‘개털’은 야외 녹음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녹음에 방해되는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인 것인데 로케이션은 늘 폴리아티스트, 개털 그리고 녹음기를 포함한 각종의 장비와 함께다.

폴리아티스트가 개털이라고 부르는 윈드실드의 모습이다.


온전한 새벽이 되기 전 늘 로케이션 장소에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은 폴리팀의 습관이다. 혹시나 오늘은 다른 날 보다 조용하지 않을까 그래서 조금은 빨리 끝나지 않을까 라는 기대 때문인데 이런 생각들과 함께 차 안에서 기웃대는 우리의 모습은 어디선가 잠복근무를 하는 형사들을 닮았다.


오늘도 쉽사리 조용해지지 않아 느긋하게 완전한 새벽을 기다린다. 그런 새벽은 보란 듯이 정갈한 분주함을 담아 내게 자랑하기 시작한다. 우렁차게 우는 새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던 새의 잠투정이 들리고, 달빛과 가로등을 조명삼아 얼큰하게 취해 기분 좋게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누구보다 빨리 달리고 싶어 재빨리 가속을 밟는 차의 엔진소리, 배달트럭에 틀어진 사연 담긴 라디오 소리들이 새벽을 채우며 짙어지고 있었다.


한층 진해진 새벽이 적막함을 데리고 올 무렵, 장비 설치를 마친 난 폴리아티스트에게 녹음 신호를 보낸다. 폴리 부스라는 주요 무대를 뒤로 하고 만들어진 간이 무대이지만 늘 그렇듯 익숙하게 신발을 갈아 신고 소리를 만들어 낸다.  폴리아티스트의’ 또각또각’ 발소리가 새벽의 고요함 위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마이크와 신발, 각종장비들을 차에 싣고 남양주에 갔다. 배를 타기 위해서였다. ’ 남양주에서 배 타기‘라니 다들 의아해하겠지만 우리가 탈 배는 사실 남양주 종합촬영소에 있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모형 배다. 폴리 부스에서는 도저히 길고 거대한 배에서 나는 크기만큼의 발소리를 구현할 수 없었기에 직접 촬영현장에서 쓰였던 모형 배에 탑승하기로 한 것이었다.


퇴근을 서두르는 해와 달리 퇴근하지 못한 우리들은 예상보다 훨씬 크고 높은 배를 (suv 두대를 합친정도의 높이로 기억한다.) 어떻게 올라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준비된 사다리는 없고, 시설 관계자들은 퇴근을 한 상황 속에 결국 선택한 방법은 몰고 온 자동차를 밟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신발을 벗고 최대한 깨끗하게 한발, 두발 내디뎌 차 보닛과 천장까지 다다랐다.


혹시 내 무게에 차가 찌그러질까 얼른 배 쪽으로 팔을 뻗어 매달리고 선  온 힘을 다해 크나큰 배에 올라타 폴리아티스트가 밑에서 올려주는 장비를 받아 올렸다. 노트북과 오디오 인터페이스를 설치하고 어두워질상황에 대비해 휴대용 조명도 한쪽에 걸어두었다. 야심 차게 장비전원 버튼을 눌러보지만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콘센트 연결을 잊은 것이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조심조심 배 밑으로 내려가 노란 전기선 줄을 당겨 공중화장실 콘센트에 연결 후 배 근처까지 길게 늘여 전기를 끌어왔다.

다시 숨을 참고 차를 발판 삼에 배 위에 오른다.( 숨을 참은 이유는 조금이나마 순간적으로라도 무게가 줄어들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도 똑같은 방법으로 몇 번이나 배를 오르내렸다.

사진엔 작게 나왔지만 실제로 보면 거대하다
배 탑승 후 찍은 사진이다. 어두울 때 보면 저 안쪽은 으스스하다.



이윽고 주변이 어둠으로 칠해지고 폴리아티스트는 나무배 위를 메인 스테이지로 삼으며 우당탕 뛰어다니고 걸으며  오디오트랙을 하나둘 채웠다. 움직임이 많은 폴리아티스트는 로케이션이든 폴리 부스에서든 짧고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는다. 움직임에서 나오는 최소한의 옷소리를 줄이기 위해서인데 좋은 소리를 위한 그의 열정은 어떤 날씨든 상관없이 이마에 땀이 맺힐 만큼 뜨겁다. 그와 달리 가만히 앉아 작업하는 일이 많은 나는 봄철의 밤에도 두꺼운 패딩을 몸에 두르고 그것도 모질라 작은 히터도 옆에 켜둔다.

5월의 새벽 남양주는 꽤나 춥다.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는 폴리아티스트.
로케이션에서 쓰이는 각종 신발들


늦게까지 이어진 녹음이 거의 끝나갈 무렵 생각지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산 주변에 사는 검은 등 뻐꾸기가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폴리아티스트가 내는 발소리에 맞물려 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이 마치 누가 소리를 더 잘 내는가 경쟁하는 듯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발걸음 소리에  피처링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뻐꾸기 덕분에 두둑하게 채워진 오디오 파일을 편집할 때 꽤나 시간이 걸렸는데 녹음한 발소리마다 존재감을 보이는 그의 소리를 하나하나 지워야 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암묵적인 기싸움에서 남양주 터줏대감 뻐꾸기가 승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검은 등 뻐꾸기의 노랫말을 뒤로하고 녹음을 마친 폴리아티스트와 나는 배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어느덧 새벽이슬이 내린 나무배 바닥과 차 천장은 평상시 보다 미끄러웠기에 자칫하면 차 위에서 떨어질 듯이 보였다.(밤을 새워서 멍 때린 정신도 한몫하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미끄럼틀 타듯이 차 앞창문을 타고 내려오는데 와이퍼 탓에 크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무척이나 아파서 잠이 확 달아났다. 엉덩이 상처와 좋은 소리를 맞바꾼듯한 이 상황이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는지 연신 폴리아티스트에게 아프다며 투덜투덜 대며 장비를 정리했다. 폴리팀만의 ‘소리’ 항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위로 출근 준비하는 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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