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스팸전화인가?' 지방에 사는 나에게 서울의 지역번호를 달고 있는 전화가 걸려오면 먼저 의심을 가진다. 대부분의 전화의 90% 이상은 핸드폰 영업, 보험영업, 골프장 영업, 리조트 영업 등의 전화영업이다. 대한민국의 핸드폰 보급률은 2022년 기준 97%. 회사 업무 전화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지, 02 같은 지역번호의 전화로는 이제 전화를 걸지도 받지도 않는다.
이러한 전화영업은, 전화를 거는 사람도, 전화를 받는 사람도 모두가 힘든 일인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이 업계에 조금이나마 몸을 담았던 사람들뿐일 것이다.
TM
전화영업은 약어로 TM이라고 불리는데, 텔레마케팅의 약자인 듯하다. 전화를 거는 영업방식인 아웃바운드와 콜센터 같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인바운드로 나누어진다. 아무래도, 두 가지 업태 중에서는 목적이 있어서 전화를 걸고 용건만 말하는 인바운드가, 모르는 사람에게 무작정 전화를 거는 아웃바운드 보다 업무가 편하다고는 하지만, 결국 두 개다 힘든 업무인건 변함이 없다.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 TM은 더 나아가 B2B.B2C 영업으로 더 나뉘는데, 기업이 기업에게 거는 영업전화(B2B), 기업이 개인에게 거는 영업전화(B2C)로 구분된다.
TM체험기
내가 대학생 시절에 아주 잠깐 TM 업계를 경험한 적이 있다. 대학생 때 소정의 용돈을 받으며 생활하던 나는, 자전거를 너무나 사고 싶었고, 자전거를 구매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와중에 접하게 된 것이 바로 ㅈ소기업의 TM 아르바이트였다.
TM은 TM인데 무언가 잘못된 방식의 TM.
친절한 건 좋지먼, 일은 별개
C엔지니어링이라는 이름의 회사는 컴퓨터의 이미지 뷰어나, 방화벽 같은 보안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이고, 나는 이 C엔지니어링의 방화벽 보안프로그램을 기업에 판매하는 B2B TM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용되었다. C엔지니어링은 사장, 사장님 부인, 그리고 아르바이트 생인 나. 이렇게 3명으로 구성된 그야말로 ㅈ소기업 중에 영세한 ㅈ소기업이었는데,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건 사장님 부부 두 분이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ㅈ소이기에 어김없이 문제는 발생했다. 개발자 출신인 C엔지니어링의 사장님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왕년에 벤처기업가로서 상도 받고 했지만, 내가 아르바이트할 당시에 그 자랑스러운 스펙은 빛바랜 스펙이었고, 사장님께서 개발한 방화벽 프로그램 역시,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는 디자인과 호환성 때문에 이 제품이 프로그램이 아니고 물건이었다면 매장의 악성재고로 남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이 들곤 했다.
진성개발자였던 사장님 뿐 아니라, 사장님 부인도 영업이라곤 1도 알지 못했고, 그 둘은 맨땅에 헤딩이라고 하듯이 두꺼운 전화번호부 책에서 추출해 낸 것 같은 부울경 지역의 기업 전화번호 리스트를 나에게 주면서 무작정 전화를 걸어 물건을 팔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영업 방향 자체가 이미 잘못되어 있었다.
매뉴얼의 부재
이 회사의 첫 번째 문제점은 바로 매뉴얼의 부재였다. TM이라는 업종은 보통 스크립트를 작성해 놓고, 스크립트에 적힌 질문을 하며, 대답의 종류를 알고리즘을 따라가, 어떠한 대답을 이끌어 내도록 하는 매뉴얼이 있어야 하는데, 이 회사는 무작정 전화를 걸어, "회사 보안 프로그램 안 필요하세요?"라고 무작정 물으면서 물건을 팔려고 하니, 먹혔을 리 만무했다. 각종 중소기업 경리들의 히스테리를 전화 반대편에서 받은 건 덤.
타깃오류
두 번째 문제점은 물건을 판매할 타깃을 잘못 정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판매하는 방화벽과 같은 보안프로그램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과 같이 주요한 정보를 다루는 곳에 영업을 해서 물건을 팔고 사업을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데, 그런 건 검토치 않고 무작정, 중소기업들에 전화를 걸어댔다. 대기업의 하청에서 생산업종을 주로 하는 곳이나 직원수 서너명의 동네 가게에 말이다. 그 어떤 정보가 PC에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동네장사하는 소기업에 이 프로그램보다 비싼 정보가 들어있을리 없었고, 혹여나 그런 자료가 있더라도, 비싼 금액을 내면서 까지 프로그램을 쓸리는 더더욱 없었다. 백신쪽은 안랩이라던가, 이스트소프트와 같은 국내 유명 대기업들의 프로그램이 이미 꽤나 방대하게 기업용으로 풀려있었고 방화벽은 윈도우의 기본 방화벽이 짱짱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일을 1달도 안 되는 기간만에 그만두었다. 자전거를 사기 위한 비용을 모은 것도 있었지만, 내가 근무했던 기간 동안, 나를 포함한, 사장님과 사장님 부인이 단 한건의 물건도 팔지 못했던 걸 보면 사장님 부부의 영업수완이나, 방식이 잘 못 된 것은 100%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직원에게 매우 친절했을뿐, 매출을 내지 못한 그곳은 영세한 ㅈ소기업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가끔, 그 당시를 회상하며, C엔지니어링의 이름을 한 번씩 구글에 검색해 보곤 한다.
그래서 C엔지니어링은 어떻게 되었냐구?
의외로 회사는 망하지 않았다. 중간에 마케팅 전문가를 구했는 건지, 영업 전문가를 영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회사는 새로운 길을 찾은 것 같다. CNC 밀링이라던가 3D 제품 제작프로그램 개발 쪽이 그들이 찾은 길이었다.
다만, 그들이 나와 함께 판매하던 방화벽 항목은, 그들의 포트폴리오, 판매제품 내역에서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마 마케팅 방법의 실수라기보다, 센스 없는 디자인과 호환성이 문제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성 개발자였던 사장님은, 이후 모 대학에서 잠깐이나마 교수 및 강사로 일하셨고, 논문이나 콘퍼런스, 보고서, 저서 등도 여럿 내셨고, 현재에도 꾸준히 개발자로서 회사를 이끌고 있는 것 같다.
C엔지니어링. 직원이었던 나에게 친절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졌던 기업.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함께 공존하는 기업.
그들은 끊임없이 길을 찾아 노력했지만, 직선루트가 아닌 미로를 헤매던 기업. 운 좋게 발견한 출구에서는 그나마 헤매지 않고 똑바로 가고 있으니, 멀리서 나마 그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친절해도, 매출을 내지 못하는 ㅈ소는 영원한 ㅈ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