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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롱 Jan 22. 2023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하다(하)

내 인생의 ㅈ소체험기 09

국가인적자원개발컨소시엄

따지고 보면 국비지원 사업 중 하나인데, 나는 2016년. 여기서 [선체의장]이라는 훈련과정을 수료했다.

최근, 실업자가 늘어나는 대한민국에, 나라에서 돈까지 주면서 기술까지 가르쳐 주는 과정이 많다. 하지만, 내 주변에 국비지원을 고민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는 차라리 국비지원 말고 어떠한 중소기업이든 들어가라고 권하고 싶다.(ㅈ소기업 말고 제법 규모가 있는 중소기업 말이다.) (국비지원은 시간대비 얻는 것도 적고, 경력에 쓰기도 애매함)


국비지원 사업을 수료하고 나면, 보통 취업연계를 시켜주곤 하는데, 아마 내가 교육원을 수료했을 당시와 지금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힘들게 교육을 수료하고(심지어 기간도 길다. 나는 운 좋게도 3개월 과정) 현장에 던져지면, 내가 받을 수 있는 임금은 최저임금이다.(물론 case by case 이긴 하지만 대부분 최저임금)

최저임금으로 임금을 산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교육원에서, 학원에서 배운 기술은 현장에는 통하지 않으니 넌 어차피 우리가 새로 가르치는 것이고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기에 임금을 많이 줄 수 없다."


와 같은 말로써 포장되어진다. "나중에 기공이 되면 임금을 올려줄게"라곤 하지만, 기공이 되기까지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지는, 햇병아리들은 알 수가 없다.

최근 추세를 살펴보니 예전에는 용접이라던가 지게차운전이라던가 하는 과목들이 많았지만 최근엔 코딩이라는 항목이 뜨고 있는 듯하다.(다들 조심하시길!)


내가 기술교육원을 수료하고 정확히 1달 후에 기술교육원 단톡방을 확인했을 때는 총원 36명 중 나를 포함한 4명만이 H중공업에 재직 중이었고, 그중에서 2명은 퇴사 준비, 1명은 이직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할 말 다했다. 언제 내일모레 없어질지도 모르는 회사에, 목숨을 담보로 일하는 위험하고 힘든 작업. 그리고 최저임금. 그것이 내가 경험한 국비지원 교육의 실체였다.




기술교육원 입교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우여곡절 끝에 마치고 기술교육원에 입교했다. 현장에서 배우기 위한 기본적인 기술을 알려주고 수료할 때쯤에는,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자격증(H중공업에서만 인정해 주는 한국선급 자격증 Q4)을 취득해서 나가게 해 준다. 하지만, 실전에서 내가 용접기를 잡을 기회는 입사 후 1년 차엔 없다고 봐야 한다. 사 후 내가 하게 될 업무는 공구/자재셔틀이다.


국비지원으로 기술교육원에 입교하는 사람은 몇 가지 부류로 나뉘어 진다.

이제 막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새내기들.

'타지에서 최저임금에 찌들어, 기술이라도 배우면 돈 좀 벌 수 있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을 하는 나 같은 케이스

대기업/중견기업을 다녔지만, 인간관계에 찌들어, 속 편히 기술 좀 배우자 하는 케이스

언제 날지도 모르는 H중공업 정규직 채용을 노리고 들어온 케이스(교육원 수료 시 우대)

공무원 시험 실패생


우리는 [기술교육원 배관 233기]로 불리며, 현장에서 쓰는 작업복과 안전화, 안전모 등을 지급받으며, 교육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기숙사까지 제공했고, 따로 지출되는 금액은 없었고, 소정의 용돈(?)과 같은 교육비도 지급되었기에, 다들 호기롭게 입교를 한 것이다. 중간에 지쳐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은 승리자다. 수료까지 하고, 입사 후 후회하고 추노 할 바에는.




잠 오는 수업, 어려운 용접

이곳은 학교와 같다. 이론 수업을 하고, 용접 실기를 배운다. 하지만, 관련 지식이 전무한 그들에게는 그저 잠 오는 자장가로 들릴 뿐이다. 그나마 나는 물량팀에서 간단한 선박용어와 도면등을 배우고 들어와서, 조금은 수월한 편에 속했는데, 그 와중에도 내가 일했던 물량팀은 H중공업 사상 최고 특이한 배(EDDA ACCOMMODATION : 선상호텔)를 건조하는 공정이었기에, 보편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고 공구이름도 잘 모르는 건 똑같았기에 어차피 시작점은 같았다.(재수도 더럽게 없지.)


배관 용어는 물론, 철의장, 목의장, 건조 등의 용어가 남발하고 어퍼데크, 발라스트 탱크, 볼라드 등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용어가 머릿속에 꽂혔다. 나중에 시험을 보기에 수료실패하지 않으려면 죽자고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나중에 입사 후엔 5%정도를 제외하곤 거의 쓸모없는 지식들이었다.(국비지원 교육에서 미수료하는 건 진짜 어지간한 빡대가리에 출결 불량이 아니면 없다.)


용접 역시 쉽지 않았다. 조선소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쓰는 전기용접 대신 플렉스 코어드 와이어 용접이라고 불리는 CO2용접을 가르치는데, 이 용접 기술은 조선소를 벗어나는 순간 쓸 일이 없다. 조선업계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전기용접을 사용하고, TIG용접 등을 썼기 때문이다. '용접이면 다 같은 용접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수료 후 '조선소가 안되면 다른 데 가서 용접하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용접면을 쓰고 용접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속도를 조절해 가며 용접을 해야 하는데, 용접물은 보이지도 않고, 첫 용접아크(불꽃)를 일으키는 것조차 어려웠다. 다만,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온 동생들은 전기용접 경험이 있어서인지, 쉽사리 기술을 익히며 어린데도 불구하고, 선배로써의 면모를 뽐내며 우릴 도와주곤 했다.(하지만, 향후 이 업계에서 자존심으로 버틴 건 나하나뿐이었다. 역시 애들은 애들이야. 명불허전 ㅈ선업계였다.)



포부만 좋았다.

3개월의 짧은 기술교육원의 마인드는 이랬다.

다들 호기롭게, 처음 기술을 배우고 용접기를 잡았을 때는, 다들 "대한민국 조선업계는 내가 책임진다." 같은 포지션이었지만, 용접불똥에 데이고, 몸에 쇳가루 냄새가 배어가며 기술을 배우는 중에는 다들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취업이 결정되었을 때는, 최저임금 6,030원. 그것이 고된 일을 하게 될 그들의 임금이었다. 그 와중에 운 좋게 지인소개로 다른 회사에 입사해서, 최저임금보다는 높은 급여를 받고 가는 나 같은 케이스도 있었지만, 그런 회사도 나중에는 폐업하고 말았으니, 이미 이 업계는 진작부터 내리막길이었던 것이다.

동기들이 입사 후 첫 달은 많은 정보 공유도 했는데, 3일 만에 사표를 내고 나왔냐니, 손가락을 다쳤냐니, 넘어졌냐니 등 좋은 소식은 단 하나도 없었다.(우리 동기 중 유일하게  여자 동기인 O양이 있었는데, 작업 중 손가락을 다쳤다(미세상처)는 이유로, H중공업 안전팀 119로 신고하는 바람에 그 회사는 뒤집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고문관이었다.)




나는 기술교육원을 수료하고, 몇 번의 회사이동을 거쳤다. 더 높은 임금을 준다는 곳으로 이직한 것이다. 여기서는 오랫동안 한 회사에 머무른다고 임금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웃긴 건 급여 상승에 대해 이야기 안 하면 1년이고 5년이고 10년이고 임금이 계속 그 자리에 머문다는 것이다.

ㅈ소기업이니까. 자기 몸값을 올리려면, 스스로 기량을 높여서,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자기 실력을 어필해 더 높은 급여로 셀프 헤드헌팅 되어 가는 방식으로 임금을 키워야 한다.

한 곳에서 10년 일한 사람보다, 다른 곳으로 계속해서 이직하며 일 한 사람. 배 이상의 급여차이가 나는 이상한 업계.

그것이 조선업계가 선업계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나는 약 5년 정도 조선업계에 몸을 담았다.

기술교육원 동기들은 나를 포함해 단 한 명도, 이 업계 남아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직한 회사에서, 대표님이 갑작스럽게 쓰러지시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이 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사건으로 내 인생은 완전히 변해버리게 된다. (사람인생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 조선업계는 최악이다. 내가 제대로 2016년부터 근무하기 시작했을 때도 내리막이었지만, 지금이야 말고 진정 바닥이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지하실은 있을 수도 있겠다만)


조선소에서 배관업계는 흔히 2인 1조로 근무를 하는데, 기공1,조공1이 한 조이다.

대부분의 기술을 가지고 있고, 혼자의 역량으로 일 할 수 있는 것이 기공, 그리고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우며, 시다바리 짓을 하는 것이 조공. 그들의 경계를 나누는 건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급여였다.

기공들의 임금이 15년 전 250 부근에 머물렀던 조선소라, 힘들지만 돈은 된다라는 인식이 팽배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임금은 오르지 않았다. 조선소의 악명 높은 기성 체계(원청에서 하청에 돈을 주는 방식)가 부른 참사였다.

그에 반해 조공들의 처지는 상당히 괜찮아졌다. 최저임금 선에서 놀던 그들의 임금은 최저임금의 상승으로 인해, 기공들의 임금과 비슷해져 갔다. 그렇기에, 기공들은 점차적으로 사라져갔고(임금은 비슷하니, 누가 힘들게 기술자로서 일하겠는가 가서 시다바리나 하지),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일하러 온 조공들만 생겨났다. 기술을 배울 생각은 없고 있던 기술자 들도 떠나갔다.

더불어, 평택 삼성 반도체 공장과 플랜트 사업에서 동일한 포지션의 일을 하게 되면, 최소 일당 15~20까지 챙겨주었으니, 아무도 조선소의 시급제로 일하려 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의 이쪽 업계 근로자들이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나라에서는 일이 힘드니까, 일을 안 한다고 생각하고 외국인, 재소자 등을 집어넣는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단지 ㅈ소기업들이라 ㅈ선업계라서, 급여가 적기 때문에 아무도 일을 안 하려고 할 뿐인데. 15년 전 임금이 지금 임금이니까 안 하는 건데.



씁쓸할 뿐이다. (국비지원 하지 말란 글이 많이 길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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