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확히 밝혀 분명하게 정하다
가정의 달을 빌미로 불효녀, 근 6개월 만에 본가에 들렀다. 그리고 엄마의 책장에서『미움받을 용기』를 발견한다. 언젠가 읽을 운명임을 은연 중에 알고 있었던 그 책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제는 읽을 시간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오랜만에 집에 간 딸은 엄마 책을 홀랑 가지고 왔다. 첫 장인 [첫 번째 밤] 어치를 읽었다. 그리고 아차! 드는 생각을 메모장에 급하게 써 내렸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의 대부분에 대해 '나만의 정의'를 내린 적이 없구나.
단지, 사람들이 정의해 사용하고 있는 익숙한 방식을 그대로 따라갔을 뿐.
책의 초입에 접어들었기에, 책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쓴 문장은 아니었다. 담화로 글을 풀어가는 방식 덕에 주인공 성격이 그대로 전해졌는데, 그 속에서 미성숙한 나를 발견한 것이다.
청년
"선생님은 저를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인정할 것 같습니까,
그 따위 철학을! 저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요."
철학자
"앉게. 이대로라면 대화가 어긋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책의 두 주인공인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다. 1장은 줄곧 따져 묻는 청년과, 담담하게 받아 이성적으로 답하는 철학자의 모습이 돋보인다. 철학자가 전해주는 아들러 철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청년의 반응이었다. 그 반응은 곧 새로운 정의를 마주하는 나의 모습이었다. 새롭게 정하게 되는 것은 생소하고 불편했다. 이제껏 몇 십 년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워 없애거나 바꿔야 했으니. 과민반응하며 애써 떨쳐 내어 왔다. 한 20년을 그렇게 산 것이다.
책의 묘미는 이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나를 투영하고 알아가는 일. 청년으로부터 나를 천천히 멀리서 다시 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정의의 대부분은, 아마도 거의 모든 건 '남의 정의'였다. 이 때문에 오는 부작용도 발견한다. 지식이 내재화 되지 않고 자꾸 휘발되는 일, 전혀 초면인 지식에서 기시감이 들어 아는 척하는 일. 내가 항상 경계하던 일이다.
아차 싶은 마음은 그냥 온 게 아니었다. 내 문제를 발견한 것이다. 통용된 정의를 터득해 온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우선 기준을 알아야 그 지점으로부터 판단하고, 생각하고, 재정의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모든 것에 내 정의를 내렸더라면, 난 고립된 사상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다만, 이제는 스스로의 정의가 필요할 때가 온 것이었다. 책장에서 우연히 책을 발견한 것처럼, 그 운명이 자연스레 찾아온 것이다.
나는 앞으로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그 뜻을 나만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분명하게 정해두려 한다. 어쩌면 책의 제목만큼이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