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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파랑새 Feb 06. 2023

독립 조사기구에 참여하다.

사회적 참사특별조사위원 조사 활동 참여와 첫 출근 신고식

사회적참사특별법(이하 사참위법)이 제정되고, 이 법에 따라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가 구성되었다. 이 즈음 피해 대책 활동을 지속할지 여부와 개인적 거취를 고민하고 있었다. 사참위가 새롭게 구성되는 상황이었기에 사참위 참여를 고민했다.


가습기살균제참사는 유해 화학물질이나 생활화학제품 관리, 소비자 문제 등 여러 현안과 관련되어 있고 법과 제도 등이 복잡한 사안이었다. 2016년 검찰수사와 국정조사 그리고 이에 대한 언론 보도 등을 거쳐 이 참사에 대한 여러 쟁점들이 드러나 있었지만 일반인들 눈높이에서는 익숙한 내용들이 아니었다. 나 역시도 피해대책 활동에 참여하면서 주워들은 ‘풍월’은 있었지만, 이 분야에 대한 체계화된 지식이나 경험을 갖춘 경우는 아니었다. 


고민한 끝에 ‘기왕 여기까지 온 것인데 참여해서 무엇이라도 해보자. 안전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기여하는 것이 그동안 활동해 온 취지에  부합된다.’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영역일 수 있지만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고, 도전하기로 했다. 그동안 활동해 오면서 알게 된 몇몇 사람들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사참위 지원을 결정한 후에 구체적으로 어느 분야를 지원할지 고민했다. 피해자와 가족이라는 당사자성, 즉 특정 이해관계인의 위치에 있다 보니, 스스로 자유롭지 못한 면도 있었다. 다소 ‘불편한 감정’이었다. ‘왜 안 돼? 안될 것도 없지?’하면서도 ‘조사기구’라는 특성상 ‘공정성’ 시비가 제기될 수 있었다. 일종의 ‘자기 검열’이었다. 스스로도 그런 생각이 들었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문제도 지인을 통해 사전에 의견을 구했다.       


조사관 채용이 ‘공채’이므로 원칙적으로는 기회의 공정성 차원에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성 시비가 있을 수 있는 만큼 진상규명이나 피해지원 분야보다는, 특정 이해관계로부터 거리가 있는 ‘안전사회’ 파트에 지원하기로 했다. 그래서 재발방지와 제도개선을 담당하는 안전사회국 가습기살균제 안전과에 지원했다. 


모집 공고에 맞게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준비하니, 일을 해보겠다는 욕심과 의욕이 더 생겼다. 안전사회에 대한 사명감과 도전정신, 그동안 해 온 피해대책 활동경험을 자산으로 삼았다. 이외에도 국회나 언론, 시민단체 활동 등 여러 사회 경험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일이었기에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이 따랐다. 잘 해낼 수 있을까.

 


     

가습기살균제참사를 다룬 책 ‘빼앗긴 숨’(안종주 저, 사계절)과 여러 언론 기사를 참고했고 가끔씩 참여했던 토론회 자료집 등을 살펴보면서 면접을 준비했다. 준비와 전형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합격했고 2018년 11월 3일부터 사참위 활동을 시작했다. 사참위 사무실은 명동 포스트타워 건물(A동)에 입주했고 120명 규모의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피해구제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피해 대책활동도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법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가피모)이 주력이었다. 2016년 검찰 수사 이후 일부 가해기업들이 보상을 실시하면서 옥시 피해자들 모임이 별도로 만들어졌다. 피해구제 특별법에는 피해자단체 구성에 대한 조항이 포함되었고, 2017년 이 법이 시행되면서 피해자모임도 분화되기 시작했다.


가피모 대표를 맡아 왔던 나는 피해구제 특별법 제정을 기점으로 활동을 접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17년과 2018년을 지나면서 가피모 대표 활동을 사임하는 의사를 타진했다. 가피모에 참여했던 많은 피해자들이 특별법에 따라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새로운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참위 참여 문제에 대해 다른 피해자 가족들에게 의견을 구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였을까. 몇몇 피해자들이 사참위 출근 첫날에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나의 출근을 반대하는 피케팅을 했다. 명분은 피해자 당사자의 참여가 조사기구의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나는 이미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 본 경우여서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접하게 되니 당황스러웠다. 한편, 조금은 서운했다. 같은 피해자 가족 입장에 있다면 더 대변하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반대를 할 경우 나서서 막아주고 응원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서운함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발목을 잡는 모양새였다. 점심시간에 30,40분 정도 1인 시위를 하는 방식의 피켓팅이었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 정도 하다 말겠지'하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은 피켓팅 하는 피해자와 같이 차담을 나누며 이해를 구했다. 그런데 거의 3,4일을 지나 일주일을 채우는 모양새였기에, 결국 시위하는 당사자에게 따로 만나서 섭섭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닌 것 같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래서였을까. 출근 반대 시위는 그 이후 중단되었다. 왜 중단된 것인지, 일주일 정도만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미 공채로 채용이 된 상황에서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나는 모른다. 따로 전달받은 바 없고, 그런 통로도 없었다. 

   



여하튼 고민 끝에 참여한 사참위 출근 첫 주의 '신고식'이었다. 피해자 대표활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업보'라고 생각했다. 내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피해자와 가족들의 답답한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또한 상식적인 수준에서 공정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기에 아쉬움은 없지 않았지만,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사참위 근무 기간 동안, 피해자 활동을 해온 대표 또는 당사자로서 정체성이나 입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어떤 견해나 입장을 피력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경우 예외적으로 한 두 차례 피력을 해보기는 했지만, 가능한 드러내지 않았다.

      

공직사회 입문 교육 과정이나 면접 과정에서도 특정 이해 당사자가 아닌 ‘공무원'으로서 조사기구의 독립성과 공직사회 윤리를 우선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받은 바 있었고, 그렇게 할 것이라고 답변도 했고, 다짐도 했다. 더욱이 내가 피해자 활동을 해온 것은 이미 그 기간이 오래되었고, 언론 등을 통해 많이 노출된 상황이어서 감출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내부 직원들 중에서도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므로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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