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돈이 없어졌다. 정확히 백만 원이 눈 깜빡할 세에 없어져버렸다. 영국에 오면서 현금으로 들고 온 백만 원, 혹시나 해서 파운드로 바꿔서 들고 왔는데 그게 없어져버렸다.
" 얼마 안 쓴 것 같은데 어디를 간 거지?? "
나는 연신 돈을 담아놓았던 종이봉투를 열어보다가 돈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다른 곳들도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 사실 도둑은 바로 나다. 내가 다 써버렸으니까.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학교 때문에 멀리 떨어져서 타국에서 지내고 있는 것과 별개로 혼자 지낸다는 것이 경제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몸소 느끼게 되었다.
일단 갖가지 생필품 ( 주방, 욕실 등등) 들이 오로지 나를 위해 필요했다. 가족들과 함께 살 때에는 이미 집에 다 있었으니까 그리고 같이 쓸 수 있었으니까 필요하지 않았던 물건들이 자취를 시작하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새로 필요했다.
하루는 생필품을 사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대만 친구의 말에 같이 시내로 향했다. 시내를 몇 번 오간 적은 있으나 지리적으로 아직 잘 모르기도 해서 흔쾌히 그 친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학교 캠퍼스를 지나서 도심 중심가로 향하는데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어...!! 비 오는데...?.. 이렇게 갑자기 온다고...? "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란히 길을 걷던 대만친구가 영국이 늘 그렇다는 표정을 하고는 날 바라보며 물었다.
" 나는 우산 있는데.. 너는?"
" 나도 있어...! 가져오길 잘했다. 역시 영국 답네."
난 혹시 몰라서 내 작은 가방에 늘 붉은색 접이식 우산을 넣어놓고 다녔었는데 그게 이번에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우리 둘은 우산을 각자 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만 친구는 특히나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친구였는데 역시나 마트로 향하는 길에도 한국의 얘기는 빠지지 않았다. 난 대단한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 내가 다른 나라의 문화에 이토록 관심이 많았던 적이 있었나...? ' 싶을 정도였다. 그 친구가 메인으로 하는 한국 얘기들은 보통 방탄소년단 아니면 한국 드라마였다. 익숙한 주제의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도시 중심가에 와있었다.
함께 돌아다니며 그녀의 친절한 설명을 같이 들을 수 있었는데 (미리 말하자면 그녀는 약간 수다쟁이다.)
" 여기는 굉장히 가성비 좋은 마트야, 저렴하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물건들을 구할 수 있어. 저기 건너편에 보이는 주황색 간판 보여? 저기도 비슷한 마트야, 그런데 서로 가지고 있는 물품들이 조금씩 달라. 그래서 난 가끔 필요할 때마다 들려. 보통 냉동식품은 저 마트에서 산다고 보면 돼. 그리고 000 마트는 조금 비싸지만 아주 질 좋은 식재료들을 구할 수 있어. "
등등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한참 여기저기를 들리다 보니 어느새 내 두 손에는 내가 장 본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 가게를 나올 때는 약간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 더 이상 우산을 들 손은 없는데 비는 아직도 내리고 양손 가득 꽉꽉 채운 비닐봉지들을 들고는 앞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할 길들을 생각하니 눈앞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어쩌나 이미 산 물건들이고 다 필요했던 물건들이었기에 내가 책임지고 기숙사로 가져가야 했다.
" 많이 무거워? 다 들 수 있겠어? "
나의 친절한 수다쟁이 대만친구는 본인 양손에 많은 물건들이 들려있었으면서도 나에게 걱정된다는 어투로 물어보았다.
"어 괜찮아... 다 들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
이 정도 무게면 분명 들고 가다가 손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게 뻔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척 그 친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걸어온 길을 비를 맞으며 다시 되돌아갔다.
비를 맞으며 꽤 무거운 무게의 봉지들을 양손에 들고는 언덕을 올라가고 신호등을 몇 번 건너고 넓은 광장을 지나 또 새로운 언덕을 내려가다 보니 여러 겹 겹친 비닐봉지 손잡이 부분이 내 손을 금방이라도 잘라낼 듯 파먹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난 들고 있던 봉지들을 손에서 팔 안쪽으로 그리고 다시 팔 안쪽에서 손으로 연신 바꿔가며 얼른 기숙사로 발을 재촉했다. 우리는 처음 왔을 때 와는 다르게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묵묵히 걸어 나갔다. 그렇게 20분 정도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기숙사에 도착했고 기숙사에 도착한 우리 둘의 꼴은 말도 아니었다.
도착해서 겨우 숨을 돌리고는 장 본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정말 많이도 사 왔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 요리 할 식료품에서 생필품까지 부엌 여기저기 그리고 기숙사 내 방에 여기저기 넣다 보니 어느새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채워 넣기 전에는 그저 잠시 머물다가 어딘가로 떠날 것처럼 보이던 방이 물건들을 채워 넣으니 그제야 좀 사람 사는 곳처럼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는 오늘 쓴 금액들을 확인하기 위해 영수증을 모아보니 '내 두 손이 무거웠던 이유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몇 번 돈을 쓰다 보니 내 백만 원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국 한 도시의 내수 경제를 살리는 데 썼다고도 할 수 있겠다. 나도 살리고 영국 내수 경제도 살리고 1석2조였다.
( 이상하게 제게 지금 글은 마음먹고 쓰려고 하면 써지지 않고 마음을 놓고 지내다 보면 또 잘 써지는 그런 게 되어버렸습니다. 정해진 요일에 발행을 하고자 습관처럼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이지만 글을 쓰기 위해 제게 맞는 방법 또한 찾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 혹시나 제 글을 기다리시는 분을 위해 이렇게 적습니다. 조금 느리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새로운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