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은 너무나 당연했던 우리의 모든 일상을 변화시켰다.
코비드로 인해 2000년 3월부터 대학교 직원들의 재택근무가 시작되었다. 재택근무 2개월에 접어들 무렵, 상사로부터 정리 해고를 통보받았다. 전례 없는 앨버타 주정부의 예산 삭감과 대학교 전체적인 조직축소로 우리 사무실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일했던 조직은 ESL프로그램이 큰 수입원이었으므로 코비드로 인한 international 학생수 감소는 재정적으로 우리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일단 120일간의 정리 해고 통보였지만, 4개월 뒤 내가 다시 복귀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다. 며칠간 잠을 설치고 마음이 힘들었다. 120일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쉴 새 없이 달려왔던 나의 생활에 일단 쉼표를 찍자고 결심했다.
일단 내 핸드폰에 알람이란 알람은 모두 off로 바꿨고, 돌돌이와 함께 하는 아침 산책 중에 시계를 볼 필요도 없어졌다. 날씨가 좋으면 우리 집 주변을 돌돌이와 원 없이 걸었다.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혼자 집을 나서야 하는 남편과 아들에게 아침을 준비해 주고, 앞뒷마당 풀 뽑고, 책 보고, 그림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맛있는 저녁을 준비했다. 사춘기의 정점에서 홀로 서기중이었던 아들은 어떠한 것도 엄마 아빠와 함께 하기를 거부하고, 내가 1층으로 가면 본인은 2층으로, 내가 2층으로 가면 본인은 1층으로, 잠자는 시간엔 지하실로 향했다. 많이 섭섭하고 걱정 됐지만, 영진이도 홀로 서는 시간이고 나도 홀로 서는 시간으로 여기자며 맘 편히 생각했다. 그리고 용기가 없어 또 시간이 없어 미뤄왔던 것들을 하나씩 적어보고 도전하고 실행했다.
온라인 성경공부
코비드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포맷의 성경공부였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비전, 그리고 그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머물러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셨다.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끊임없이 묻고, 하나님을 내 모든 삶의 영역의 왕으로 인정하며 내 신앙생활을 다시 돌아본 귀한 시간이었다.
쓰리 시스터즈 행복 원정대와의 만남
이곳 한인 커뮤니티에 하이킹 친구를 찾는 광고를 올려 산을 좋아하는 여동생 두 명을 만나게 되었고, 함께 하는 여행과 산행을 통해 지금까지의 가족중심의 여행에서 취미가 맞는 동성 친구들과의 여행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젠 부모를 따라다니지 않는 아들, 이젠 집에 있는 게 가장 좋다는 남편, 더 이상 그들을 설득하며 또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하며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됐다. 마음 맞고 좋아하는 게 비슷한 시스터즈들과 인생의 또 다른 재미를 맛보게 되었다. 와이프가 이거 하자 저거 하자 들들 볶지 않으니 남편도 이 모임을 적극 지지해 주었다. 절대 나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는 남편 때문에 한 번도 도전해 보지 않았던 장거리 고속도로 운전도 하게 되었다. 남편의 도움 없이 텐트를 치고 도끼로 나무를 쪼개어 불을 피우고, 우리 셋이 셀 수 없는 행복한 추억들을 여동생들과 만들어 갔다.
아들 피부 관리
사춘기 영진이의 얼굴에 좁쌀 같은 여드름이 가득했는데, 닥터가 처방해 준 약과 하루 2리터 물 마시기를 통해 아들 피부가 많이 좋아졌다. 세끼 잘 챙겨 먹인 엄마의 정성도 당연히 한몫했다.
아들 수학 과외 진행
여름방학 기간 중 G11 math 30-1을 미리 공부하고 싶어 했던 영진이를 위해 좋은 과외 선생님을 소개받고 함께 공부하는 기회를 통해 수학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캐나다에서 사교육이 왜 필요하냐며 불만스러워하는 남편을 어렵게 설득했다. 내가 남편에게 받았던 매주 백 불의 용돈은 영진이의 과외비에 보탰고 영진이도 자기의 돈을 보탰다. 남편은 1주일에 한 번씩 과외를 받은 걸로 알지만 두 번씩 총 14번 ($70x14=$980)을 통해 30-1 절반을 마칠 수 있었다. 영진이의 최애 과목이 과외를 통해 science에서 수학으로 변경되었다.
그림 그리기 그리고 그림 선물하기
나의 또 다른 취미 중 하나는 Acrylic Painting이다. 이때 맘에 드는 그림들을 많이 그렸고, 또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책 읽기와 글쓰기
박완서 작가는 만 78세에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라는 산문집을 내며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自閉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주었다."라고 했다. 나도 같은 이유에서 글을 써보자고 마음먹었고 내 손끝이 한글 키보딩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 때 키보드를 신나게 두들겨야겠다는 생각에 많은 책을 읽고 서평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곳 키보드는 당연히 알파벳만 있고 한글 타이핑을 위해서는 나는 전적으로 내 손끝의 기억에 의존한다.
인터넷 뱅킹
은행에서 일하는 남편을 둔 나는 은행일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쉬는 기간 중 인터넷 뱅킹을 해보리라 했는데 실행해 옮겼다. e-transfer와 주식 거래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ROE/EI/CERB
나에겐 거리가 먼 것들이라 생각했는데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고 나니 이런 것들이 어떤 식으로 집행이 되고 내가 이용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리 해고 당시 서류에 적혀 있던 복귀 예정일을 딱 1주일 남긴 시점에서 상사인 M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Hi Sylvia, do you have time today for a phone call? Let me know when works or just call me at xxx-xxx-xxxx. I’d like to talk to you about your return to work ^^.”
5월 초 해고통보 때에도 문자를 보내와 전화를 달라고 했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다시 돌아와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M은 지난 10년 동안 나의 상사였고, 날마다 함께 모닝커피를 사러 가는 내 커피 친구였다. M으로부터 받은 해고 통보, 비록 120일간이었지만 며칠간은 잠을 못 이룰 만큼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CERB (Canada Emergency Response Benefit - CAD 2,000/4 wks)를 받으며 정리해고 기간 동안 benefit까지 유지해 주어서 꿀 같은 휴식을 즐겼다.
사무실에 복귀해 상황을 보니 정리 해고 통보를 받은 직원들 중 30% 정도만 복귀콜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1년 정도 더 근무하다가 대학교내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되었다. M은 내가 사무실을 옮긴 뒤 6개월 후 본교에 미팅콜이 있어서 갔다가 그 자리에서 해고를 통보받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사무실에서 짐도 챙기지 못한 채로. 그 몇 개월 후 내가 일하던 조직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최근 읽은 김미경 책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는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라는 글을 보았다. 나에게 정리해고는 쉼 없이 달려온 나에게 꿀 같은 휴식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불만스러웠던 나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
여전히 나는 매일 아침 알람을 듣고 일어나기 힘든 몸을 침대에서 끌어내 씻고, 화장하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부리나케 아침을 준비해 남편 아들과 챙겨 먹고, 직장으로 향한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가 가장 기분 좋고, 일요일 점심시간 이후로는 조금 우울해지며 또 다가오는 월요일을 맞을 준비를 한다. 하지만 이런 나의 일상이 당연한 건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게 감사라는 것을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