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 성찰의 감성 테마시
초등학교 2학년,
낯선 도시로 전학 가던 날
아버지가 건네준 일기장을
두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나만의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
일기장은
꿈을 가꾸는 작은 방이었고,
말하지 못한 마음을 접어두는
조용한 밀실이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빨간 세계문학전집은
세상을 처음 배우던
나의 작은 지구본이었고,
해안선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바다였다.
책을 펼치면
페이지 사이로 지나가던 바람이
나를 어디든 데려갔다.
빨간 머리 앤이
초록 지붕 아래서 꿈을 키울 때,
나는
작은 자취방에서 나만의 꿈을 키우며
햇빛을 받아들이는 잎사귀가 되어
조용히 성장하는 법을 배웠고,
신영복 님이
가장 어두운 방에서도
따스한 언어를 잃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상실의 방에서 글을 놓지 않으며
거센 물살을 거슬러
강으로 돌아가는 연어가 되어
버거운 하루를 견디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쌓인 시간들은
일기장 속에서
삶의 지문이 되고
빛의 나이테가 되었다.
오래 봉인해 두었던
그 일기장을 다시 펼치자,
페이지 끝에서
오랜 숨결의 바람이 불어왔다.
하얀 종이 위의 작은 글자들이
세월을 먹고
어느새 울창한 숲이 되어 있었다.
아—
나는 그때 이미,
글의 숲을 가꾸는
작은 숲지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