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회상의 감성 테마 에세이
엄마의 뜨락
엄마가 닭장 안으로 들어갔다.
“꼬꼬댁!! 꼬꼬~~”
그 안의 대엿 마리 닭들이 엄마를 피해 맹렬한 기세로 울어대며 달아났다. 엄마는 푸드덕거리는 닭 중 가장 큰 놈의 날갯죽지를 잽싸게 낚아챈 후 곧바로 닭의 목을 비틀었다.
엄마는 화덕 위에 걸린 큰 솥에서 팔팔 끓고 있는 물을 닭 위에 끼얹고 힘없이 축 늘어진 닭의 털을 야무지게 뽑았다. 세 자매의 휴가 마지막 날, 왜소하고 연약한 팔순 가까운 엄마 팔뚝 희미한 핏줄 속에는 어디서 끌어모았을까 싶은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언니의 고등학교 진학으로 초등학생이었던 오빠와 나는 도시로 유학을 가, 엄마는 젊은 시절부터 어린 자식들과 생이별을 했다. 당시 아버지는 부면장이고 염전이 있는 시골 유지였는데 다 정리하고 내가 중학생일 때 도시에서 해산물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이어 실패하고 아버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김 양식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농사만 짓던 엄마는 아버지가 노를 젓는 작은 배를 타고 칼바람이 매섭게 부는 바다로 나가 김을 채취했고 다음 날 새벽 3시에 일어나 김줄기를 잘게 다지고 그걸 틀에 붓고 말리고 뜯는 작업을 하느라 밤중까지 일했다. 갑자기 어려워진 형편 속에서도 여섯 자식을 교육시키느라 엄마의 뜨락에는 비바람이 그칠 새가 없었다.
긴 세월이 흐른 뒤, 아버지가 돌아가신 첫 해가 된 여름에 세 자매는 홀로 계시는 엄마를 뵈러 고향에 갔다. 자식들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엄마는 마당에 나와 서성대다가 우리가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두 팔을 벌려 맞이했다.
“어떠냐, 엄마 혼자서도 잘 살고 있지?”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멍석 위에는 기세 등등한 여름 햇살을 받으며 부지런한 엄마의 손길로 갈무리한 빨간 고추가 널려 있었다. 엄마는 언덕배기 밭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깨, 콩이 여물고 있었고 짙은 초록빛 줄기가 뻗어가고 있는 고구마밭 가장자리 무성한 풀섶에는 수박도 뒹굴고 있었다.
다음 날 동생과 집안 대청소를 하다가 다락방에서 큰 함을 발견했다. 그 함 속에는 놀랍게도 십수 년 간 아버지가 도시에 있는 어린 자식들에게 보내고 받았던 다섯 뭉치의 편지가 있었다.
"조석으로 찬 기운에 건강 상하게 될까 염려가 된다. 이제 연탄불을 피워야 할 텐데 새로 얻은 자취방이 허술하여 연탄가스 샐 염려가 있으니 반드시 먼저 종이에 불을 붙여 태워보도록 하고 장판을 열어 구석구석 연기가 나는가 봐라."
"너희 엄마가 막냇동생을 가졌단다. 몸이 썩 좋지는 않지만 너희들 보고 싶다고 올라가니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 나가도록 해라."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쳤던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이 편지를 받고 너무나 좋아서 엄마를 맞이하러 오빠랑 같이 버스정류장에 나갔다. 임신에 차멀미까지 하고서 파리해진 모습으로 버스에서 내리신 엄마의 양손에는 주저리주저리 보따리들이 들려 있었다. 그때 엄마가 항아리에 담아 온 새콤하게 익은 파김치는 어린 내 마음의 허기를 달래주었고 미뢰에 남겨진 알싸한 감각은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무의식 속에 옹이 박혀 세월을 관통하는 그리움이 되었다. 추억의 강물에 두레박질을 했더니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기억들이 펄떡펄떡 살아났다. 그 기억들을 매만지며 그리움에 흠뻑 젖은 동생과 나는 비바람이 몰아쳤던 엄마의 뜨락에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하길 빌었다.
휴가 마지막 날 저녁에 우리는 엄마가 잡은 닭에 각종 약재를 넣어 끓여낸 닭백숙을 마당에서 먹었다. 과거 어느 날처럼 별들은 정겨운 빛을 뿌려주고 세 자매는 아버지 편지로 촉발된 까마득한 옛날의 기억들을 소환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엄마, 그때 항아리에 담아 온 파김치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아세요?”
“오메 시상에, 항아리에 파김치를 담아 갔어야? 까맣게 잊어분 일이구나.”
그날 밤 엄마는 자식들에게 보낼 먹거리 챙기느라 바삐 왔다 갔다 하다 미끄러져 크게 허리를 다치셨다. 오직 자식만 생각하는 엄마 때문에 나는 속상해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농사도 그만 접으시고 몸만 생각하라고 했더니 엄마는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나 당신이 살아오면서 느낀 생각을 찬찬히 말했다.
"내가 평생 흙에서 살았는디, 흙만큼 정직한 것은 읎더라. 땀 흘린 대로 결실을 내 주는디 농사만 짓던 사람이 단박에 그만 두기는 참말 어렵지야. 글고 내 자식들 농약으로 키운 작물 먹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봐라, 저 고추만 해도 농약을 얼마나 치는지 아냐. 엄마는 느그들 입속에 들어가는 음식, 내 손으로 곱게 건사해서 먹이고 싶었단다. …… 근디 느그들한테 성가시러운 일을 만들었구나. …… 인자 알았다. 농사일 정리 하마.”
내가 도시로 엄마를 모시고 왔다. 허리 전문병원에서 척추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완쾌하기까지 엄마는 우리 집에서 세 달 간 계시면서 가족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내가 느그들한테 폐를 끼치고 있구나.”
“아니요, 엄마 이제 힘든 일 하지 마시고 우리 곁에 오래만 계셔 주세요.”
그로부터 십수 년의 시간이 지났다. 엄마는 자식들 만류에도 여전히 마늘 농사, 텃밭 농사를 지으면서 그 소출을 6남매에게 택배로 보내고 있다. 나는 30여 년 간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봄에 고향을 찾았다. 닭장을 부수고 텃밭으로 일군 자리에는 상추, 부추, 쪽파 등이 쑥쑥 크고 있었고 우물이 있었던 뒤란에는 미나리가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갈수록 엄마는 쇠약해져 가고 있지만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골이 깊은 얼굴에는 자애로운 미소가 어려 있다. 생이 위태로울 정도로 거친 강풍이 몰아치기도 했지만 그 위기를 잘 넘기고 자식을 올곧게 키워낸 엄마의 뜨락에는 여전히 강한 생명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생명이 숨 쉬고 있는 엄마의 뜨락 wonderf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