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마도 초등학생일 때의 어느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분당에서 성북동에 있는 교회까지 온 가족이 차를 타고 갔었다. 교회 일정이 끝나면 항상 맛있는 점심을 먹었는데, 그중 나에게 최애 메뉴 두 가지는 성북동에 위치한 금왕돈가스와 함께 가까이 자리한 기사 식당의 돼지 불백이었다. 보통의 불백집이 그렇듯이 가게 밖에서 연탄불로 고기를 구워 공깃밥 뚜껑 같은 그릇에 불백을 가득 담아 주는 형태였다. 그 돼지 불백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어느 날 엄마는 집에서 연탄불로 직접 돼지 불백을 만들어주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 일요일은 아빠와 둘이 기사 식당에서 돼지 불백을 먹고 있었다. 기사 식당답게 혼자서 식사를 하시는 아저씨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날도 그랬다. 그런데 밥을 먹다가 어느 순간에 맞은편에 앉으신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내가 관상을 좀 보는데, 너는 참 큰 사람이 될 관상이다.
어린 나는 낯선 아저씨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 무서웠지만, 그때 그 한 마디는 한참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 순간이 멍하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 나는 멍~하게 있었다. 아빠는 당연히 감사의 인사를 했고, 어린 나 또한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분의 그 확신에 찬 표정과 함께 큰 사람이 될 거라는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사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에게든 할 수 있는 참으로 어렵지 않은 말 한마디이다. 그 한 마디가 내 인생에 이렇게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아직까지도 끼치고 있을지 그때 그 아저씨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 가벼운 한 마디를 아직도 내 부적처럼 믿고 있다. 성북동의 기사 식당에서 뜬금없이 반대편에 있는 아이를 보며 관상 이야기를 꺼냈고, 그 이야기가 심지어 '큰 사람'이 될 관상이라니!
교육 심리학을 굳이 전공하지 않아도 우리가 일상 속에서 흔히 알고 있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긍정적인 기대나 관심을 주면, 실제로 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 좋은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충족예언이라고도 하는데, 남에게가 아니더라도 나 자신에게도 계속해서 잘 될 것이라고 되뇌이다보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에 치이고 스트레스 많고 상처도 많은 우리들에게 피그말리온 효과는 때때로 미치도록 힘든 순간에는 희망고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당장의 오늘이 오는 것이 두려운 사람에게 피그말리온 효과는 아쉽게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기대와 사랑, 관심은 수치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수십 년 전 일요일 불백집에서 그 아저씨는 나에게 100의 진심을 줬을 수도, 5의 지나가는 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받아들였던 나는 어떤가? 나는 100 그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반대로, 내가 교사 시절 모든 학생에게 100을 주려고 노력했겠지만 어떤 학생은 10으로 어떤 학생은 80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처럼, 나의 관심과 기대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부모의 사랑도, 연인의 사랑도, 친구의 우정도 그렇다.
그럼에도 괜찮아, 너는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
우리가 남에게 실망하는 순간은 대부분 비슷하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상대방에게 기대하고 관심을 쏟는 만큼 돌아오지 않거나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올 때 가장 실망하고 상처를 받는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상대방에게 그만큼 기대하고 관심을 쏟은 이유나 마음은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은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대를 탓한다. 미워하고 실망한다. 내 20년 지기 친구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 관심과 사랑의 총량은 다르구나
나는 그 친구를 평생 친구라고 생각하고, 정말 많은 관심과 우정, 애정을 쏟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정말 주변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큰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망하고 아쉬웠지만, 결론적으로는 사람의 관심과 사랑의 총량은 정말로 다르고 표현 방식 또한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연애를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연락을 하루 종일 하는 것이 관심의 표현이라면 어떤 사람은 하루에 한 번만 통화를 해도 그 사랑이 채워지는 사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을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잘해주고 싶고 아낀다면 내 진심 어린 관심과 사랑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건, 당신의 마음속에서 당신의 마음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지 돌아오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하는 행동과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돌아올 무언가를 기대하고 상대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고 있다면 그것은 나의 어떤 결핍에 대한 충족의 욕구이자 사람에 대한 집착일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애정 결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가 두 학기의 담임을 마쳤을 때, 한 여학생이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던 이 내용은 "선생님은 기억 못 하시겠지만, 선생님께서 해주신 한 마디 덕분에 제 친구가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었어요." 나는 좋은 사람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언제나 누군가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보니 어떤 순간에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 인간관계에 대해 좋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던 성북동 돼지불백 기사식당의 그 아저씨는 나에게 어떤 기대도, 어떤 마음의 이끌림도 없이 그냥 던진 말일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상대방이 나에게 거는 어떤 기대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뿐더러, 내가 상대방에게 주는 사랑도 주는 그 마음에 만족해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 약간의 중심이 없는 이 글에서 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당신이 주는 사랑과 관심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반드시 상대방에 마음에는 닿게 되어있다. 별 빛이 지구에 도착하기까지 적게는 수십광년에서 많게는 수만광년이 걸리듯이 누군가의 마음에 당신의 마음이 닿기까지는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 믿음을 잃지 말기를. 그리고 사람을 향한 당신의 마음을 믿기를 바란다.
그 시간과 마음의 힘을 믿는다면, 오늘도 당신이 다른 소중한 사람에게 하는 한 마디가 언젠가는 그 사람의 인생에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길.
그러니,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말만 해주려고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어도 적어도 내가 내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은 이에게 오늘이 지나면 할 수 없는 말은 아끼지 말고 해 줄 수 있는 용기가 가득한 오늘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