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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타킴 Mar 07. 2024

6화. 넌 어떻게 한 골을 못 넣냐?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돼

나는 어릴 때,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겪은 세대의 남자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안정환이, 박지성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평양시 축구대표팀이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관중이 가득 찬 스타디움에 베스트 일레븐으로 사진 찍힌 우리 할아버지의 흑백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내가 왜 축구에 미쳐있었는지 그 DNA를 깨달을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미사리 축구장에 전국 축구대회를 나간 적이 있다. 그날 우리는 예선전에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뒀고, 나는 전반에 골을 넣었다. 후반에는 멤버가 대거 바뀌며 나도 교체 아웃 되었고, 후반에는 추가 득점 없이 경기가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돌아오는 좁은 차 안에서 서로의 땀 냄새를 맡으며 우리는 매우 신나 있었고, 나는 그때 이 한마디를 했다.


"야, 어떻게 후반에 한 골을 못 넣냐"


그리고 앞자리에 있던 어머니에게 혼이 났다. "다들 열심히 뛰었고 그래서 이겼는데 네가 골을 넣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지!"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내 입장과 내 기분만을 생각에서 내뱉은 말이 다른 친구들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문득 미안함이 가득 찼다.


어렸을 때부터 "네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니?" 식의 꾸중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나도 내가 어떤 행동이나 말을 했을 때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 지부터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입장과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해야 좋을까?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 이런 충격적인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당신의 감정과 너무 거리가 멀어요." 즉, 내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와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과 상황에 내 모든 생각과 마음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내가 불편한 것보다 상대방이 불편한 것이 더 마음에 쓰이고, 내가 아픈 것보다 상대방이 아픈 것이 더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이 무너지고 쓰라려도, 상대방이 우선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노력 중이다. 내 마음을 우선시 하자.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자. 내가 내 감정을 마주하자. 그런데, 아쉽게도 평생을 이렇게 살아오다 보니 그것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수많은 시간들과 사람을 만나다 보니 내 중심부터 정확히 세우고 내 인생을 살 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나답게 매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 한 번 나의 글에서 다룬 적이 있는 심리학자의 이론이 있다. 교육학을 전공하며, 가장 흥미 있게 공부했던 분야가 바로 교육심리학인데, 그중에서도 미국의 심리학자인 로버트 엘 셀만(Robert L. Selman)의 '사회적 조망 수용 이론'을 가장 흥미롭게 기억하고 있다.


‘사회적 조망 수용이론'을 쉽게 설명하자면 그는 다른 사람의 입장과 관점을 이해하는 능력을 ‘조망 수용(Perspective-taking)’능력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조망 수용 능력은 사회적 조망 수용 5단계(0~4단계)로 나뉜다.


0단계 미분화적 조망: 타인의 기분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

1단계 사회정보적 조망 수용: 타인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건 인지하지만, 정확히 구별하지는 못함

2단계  자기반성적 조망 수용: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으나 동시에는 불가

3단계  상호작용적 조망 수용: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신과 타인의 입장을 이해 가능

4단계 사회적 조망 수용: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 자신과 타인을 포함하여 집단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체의 조망을 이해하는 최상위 수준


셀만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을 이렇게 나누었다. 나는 사람을 이해할 때 이 기준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의 심리 수준이나 상황을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성인임에도 0~1단계에 머무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 재밌게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신경을 1도 쓰지 않기 때문에 사회성과 대인관계에는 문제가 있지만, 협업이 필요하지 않은 전문적인 일이나 대면이 필요 없는 솔로 플레이가 가능한 업무의 경우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것에는 영 재주가 없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0~1단계에 해당하는 미성숙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과 삶에서의 배움, 사회생활이 나를 높은 단계의 사람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셀만의 '사회적 조망 수용 이론'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 저 사람 진짜 완전 0단계야! 대화가 안돼 진짜..." 이렇게 끝나고 상대를 평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나는 3단계의 사람은 되는 것 같은데 0단계의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네?'라고 한다면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사람은 각자가 살아온 인생에 따라, 가르침과 배움에 따라, 친구 집단에 따라, 인생에서의 일련에 사건에 따라, 다른 성격과 다른 성향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 원래 남 생각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큰 상처를 받아 일부러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매일 내 문을 열어주던 동료가 오늘 문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도 그는 남의 생각과 배려가 없는 사람인 것이 아니라 그냥 오늘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을 만큼 신경 쓰이는 일이 있거나 단순히 내가 뒤에 있는지를 몰랐거나, 그냥 오늘따라 그러고 싶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판단하려 하지 말고 이해해라


지난 글에서 서두에 언급했던 노래가사에서 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모두가 그럴 수 있음을 이해하고, 용서도 해보고' 우리는 남의 입장에서 남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선택과 함께 진정으로 미움받을 수 있는 용기까지 가질 수 있다.


간혹 '미움받을 용기'에 대해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미움받으면 어때?' 하는 것은 그냥 잘못에 대한 합리화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움받을 용기'란 진정으로 타인을 위하고 나를 위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고 상대를 무시하며 '미움받아야지!' 하는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잘못'이다.


우리는 남 생각만 하며 살 필요가 없다.

우리의 생각의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타인의 입장을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려 하는 당신의 행동과 말의 결론이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그 시도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너무도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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