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타킴 Mar 05. 2024

4화. 엉덩이가 부순 안경과 죄책감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돼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꼬마일 때의 일이다. 그날은 우리 집에 사촌 누나 두 명과 우리 누나까지 총 네 명이 신나게 마루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내 기억에는 굉장히 정신이 없었고 다들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느라 바빴다. 체력이 왕성한 나도, 잠시 지쳤었는지 마루에 있는 탁자에 걸터앉았었다. 뭐랄까 무의식적으로 '아 쉬어야겠다'하고 앉았던 것 같다. 그리고 무언가가 불안한 소리가 내 엉덩이에서 들려봤다. 


빠지직!


엉덩이에서 들릴 수 있는 소리가 귀엽고 시원한 방귀소리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건만, 하필이면 사촌 누나 중 한 명이 올려둔 안경 위에 앉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모든 범죄의 현장과 똑같이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날 못 봤겠지?' 하는 생각에 일단 자리를 급히 떴고, 초등학교 저학년의 어설픈 연기력으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들의 무리에 합류를 하여 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부서진 안경은 당연히 그들과 부모님에 의해 발견이 되었고, 나는 마치 현장에 없었던 사람처럼 먼 산을 쳐다보며 다른 놀이를 하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가 의심을 받았고, 나는 용의 선상을 가볍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이 상황을 고백한 적이 있다. 다행히도(?) 아무도 그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기에 큰 여파 없이 지나갈 수 있었지만, 그날의 나의 행동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죄책감과 민망함으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당연히 실수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죄책감은 있다. 그것은 의도하고 저질렀던 범죄나 잘못된 행위였다기 보다는 나도 모르게 저질렀던 실수에 가까웠을 것이다. 상황이 그래서, 무언가가 더 두려운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책감을 가졌음에도 차선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차선의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와 누군가에게는 억울한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발적인 선택에 항상 신중해야 한다. 물론, 우발적이 아니더라도 타의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결과를 책임져야 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모든 인간은 실수를 한다. 그래서 '선택'인 것이다. 


내가 의도하고 안경을 부순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내 엉덩이가(?) 한 일이기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어린 그날의 그 순간 나는 비겁하게 도망쳤고 그 순간 끝까지 내 잘못을 당당하게 자백하지 못했다. 우리는 늘 그렇다. 피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하다못해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도 그렇다. 나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지만, 다른 것이 먹고 싶은 동료들이 있을 수 있기에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주관을 이야기했다가는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먹고 싶은 것만 먹는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을 보면 오늘 점심 뭐 먹을까? 김치찌개? 쭈꾸미? 순두부? 곱창전골? 이렇게 여러 가지 옵션을 주곤 한다. 내 마음속에는 이미 정해둔 답정너가 있지만, 그 책임을 내가 지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점심 메뉴가 죄책감까지 갈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남의 어떤 시선이든 책임이든 받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어느 선택을 함에 있어서 후회나 죄책감이 드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심리 상담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혹은,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다 보면 '네 잘못이 아니야'를 참 많이 이야기한다. 물론, 지나가던 사람을 아무 근거 없이 때리지 않는 이상 인간관계에 100대 0은 없다.(범죄와 같은 행위들은 당연히 제외이다.) 인간관계를 맺다 보면 필연적으로 죄책감이 들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간혹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한 번 쯤은 그럴 수 있어! 괜챃아. 


그러나, 포인트는 한 번쯤이라는 것이다. 내 엉덩이가 저지른 실수와 그 실수를 피하기 위해 했던 비겁한 결정은 딱 한 번이면 족하다. 그 이후부터는 실수가 아닌 알면서도 저지르는 잘못에 해당된다. 혹은 실수인줄 알면서도 행하는 실수는 실수가 아닌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이다. 


당신에게 어떤 순간 죄책감이 드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면, 혹은 이미 저질렀다면 엎질러진 물과 상처받은 상대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닦을 수 있는 것도 그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힘도 온전히 당신에게 있다. 시간이 늦었더라도 "사실 제가 그때 안경을 엉덩이로 부순 범인이에요! 죄송합니다."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면 반드시 고백해야 한다. 왜, 개그맨 박명수의 어록이 있지 않은가. '늦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빨리 실행해라!' 


그래야 적어도 당신은 미움받을 용기를 극복해 더 나은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는 주제의 에세이지만서도, 할 수 있음에도 용기를 내지 못해 타인해게 상처와 트라우마를 주면서까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 


용기를 가져라!


지금이라도 내가 엎질러 놓은 물을 닦을 수건을 준비하고, 

지금이라도 내가 상처 준 사람을 어떻게 안아줄지 고민하고, 

지금이라도 내가 부쉈던 안경 때문에 억울했던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그 마음을 감당해야하는 것은 젖은 바닥이고, 사람이다. 

그럼 당신은 더 이상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그러니 용기를 가지자!

상대에게 당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지금 그 용기를 낸 당신은 반드시 좋은 사람일 테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