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그럴 수 있음을 이해하고 용서도 해보고, 감싸주며 품어줄 수 있는 푸르른 마음이 함께하길"
-푸르른 마음(Prod.로이킴) 박종민 및 로이킴
내가 유치원생일 때의 일이다. 아마 4-5살쯤이었을까? 동급생 남자아이와 이유 모를 갈등으로 싸우게 되었다. 아마도, 장난감이 원인이거나 알지 못할 그날의 질투심이나 미움 때문이었겠지. 그때는 배운 욕도 없었기에 그냥 악에 받쳐서 싸웠을 것이다. 그날 그 친구는 내 이마를 소톱으로 강하게 긁었고, 깊은 손톱 모양의 상처가 났다. 피도 많이 났겠지만.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인생에서 원수를 질 만큼 큰 싸움도 아니었기에 나는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님은 나를 집으로 불러 그 아이의 진심 어린 사과를 하게 했고, 나에게 밴드와 연고를 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상처는 30년도 지난 지금도 내 이마에 남아 있다.
상처에는 새 살이 돋아 날까?
아쉽게도 어떤 연고를 썼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새 살은 돋아나지 않았다. 간혹, 신체에 난 상처를 덮고자 그 자리에 타투를 세기 거나 가리기 위해 옷으로 상처 부위를 꼭 덮고 다니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신체에 난 상처는 새 살이 돋아난다고 해도. 말 그대로 '덮는' 것이다. 덮어질 뿐 그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쇄골이 세 조각이 났을 때도, 혹은 여성이 사랑하는 아이를 낳았을 때도 그 신체의 상처와 흔적은 절대로 덮이지 않는다. 물론, 인간사의 사랑의 힘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대단하기에 때로 상처는 사랑의 힘으로 쉽게 가려지기도 한다. 그치만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은 아쉽게도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내 몸은 기억하고, 깊은 곳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저, 재활을 하고 산후조리를 하여 최대한 그 상처를 보이지 않게 다른 방법으로 잊고 다른 부분을 강화시켜 덮을 뿐이다.
마음의 상처는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축구경기에 있어 승부욕이 가장 넘치던 고등학생 시절에 나를 귀찮게 하는 상대방 수비수 동급생을 벽 쪽으로 강하게 밀어버린 적이 있다. 나는 그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순간적인 나의 승부욕과 선택이 상대방을 크게 다치게 할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도 그 친구의 반까지 찾아가 거듭 사과를 하고 상처 부위를 아물게 하기 위한 연고를 갖다 주었다. 그럼에도 그때의 기억은 나에게도 그에게는 더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우연히 20년이 지난 시점에 같은 회사에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지금은 웃으면서 그때를 회상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성인이 된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준 상처를 다른 사람이 덮어줄 수 있길 바란다."
마음의 상처를 받은 이는 다른 사람에게 또 의지하고 희생하며 그때의 상처를 잠시나마 잊을 수는 있지만 덮을 수는 없다. 심지어 그것이 다른 사람이라면, 그건 덮고 잊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이다. 덮어줄 자신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고 판단된다면 다른 사람으로 그 상처를 덮어줄 기대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문제는 우리가 사회에서 흔히 겪는 학교 폭력, 가정 폭력등의 수많은 범죄와도 조금은 연관된다. 이미 상처를 깊게 받은 이에게 그 상처를 덮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가장 좋은 방법은 상처를 준 이가 그 상처를 치유해 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방법 밖에 없다. "미안해, 내가 너를 치유해주고 싶어" 물론, 이미 시간이 늦고 상처가 깊어서 그 사람에게 트라우마가 되어버렸다면 그건 당신이 해결해 줄 수 없다. 그러니 용기를 내야 하는 시간과 상황은 한정되어 있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나 또한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줬고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안겨줬기 때문이다. 물론, 범죄의 영역까진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냈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아무리 늦었더라도, 아직도 그 상처를 잊지 않고 어떻게든 치유해주려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스쳐가는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믿었던 소중한 사람에게도, 심지어는 가족에게도 상처를 받기도 한다. 반대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본래, 상처를 준 사람은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가요?
당신이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상처를 받은 사람은 내 이마에 난 손톱달 모양 상처처럼 그 상처를 평생 지고 가야 한다.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미안하고 죄책감 드는 마음을 생각하면서 살지 않을 것이다. 원망스럽게도 그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 내 인생이 잘 풀릴 때 동시에 생각한다. '고맙다' 내가 그렇게 상처를 줬음에도 내 인생을 저주하지 않아 줘서 고맙고, 내 인생이 플리지 않을 때 '그랬구나' 그때 당신의 상처가 얼마나 컸기에 나에게 이런 인과응보의 결과가 나타는가 하고 말이다.
당신은 매우 완벽하고 매우 좋은 사람이다. 적어도, 내가 지난 과오에 대해 인정하고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고 덮을 수 있는 게 나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용기가 없을 뿐이다. 이제 내가 다가가면 싫어하겠지? 내가 덮어주는 게 오히려 상처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을 아닐지 고민할 것이다. 나도 항상 그랬고 아직도 그러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정면으로 마주치기로 마음먹었고, 그 사람과 마주하게 된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다.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지게 되면 상대방에게는 트라우마가 될 것이고 내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용기를 가져라. 당신을 용서할 수 있는 힘 용기는 조금 뒤면 그 힘을 상실하고 말 것이니까.
떠나려 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가 삶에 대한 고민이 들 때마다 '떠나려 하는 모든 이들에게'라는 제목의 유튜브를 보곤 한다. 슬픈 노래가 1시간 동안 나오는 영상인데 사실 영상이 아닌 사진이다. 유튜브에 있는 이 콘텐츠에는 무려 7만 여개의 댓글이 달려있다. 하나 같이 이전 기억에 대한 미안함과 고백이 담겨있다. 나 또한 이 글에 댓글을 달았던 기억이 있다.
나의 가벼운 말 한마디에, 행동에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 미안합니다. 부디 추운 겨울날의 입김처럼 스르륵 사라지고 행복하길 바랍니다. 나 또한 교훈 삼아 새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베풀겠습니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그들의 상처를 회복해 줄 시간을 전부 놓쳐버렸고 이제는 연락조차 닿을 수 없이 멀어져 버렸기에 그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고 절대로 잃지 말고, 모종의 이유로 갈등이 생겼더라도 더 늦기 전에 덮어주어라. 그 힘을 가진 사람은 당신뿐일 테니. 그러니 용기를 내라.
그럼에도,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까지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고,
내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또한 내가 끝까지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당신의 마음이 조금의 죄책감이나 아직도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그 힘은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용기를 내라.
지나간 선택은 돌아오지 않고 상처받은 영혼은 회복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상처를 보며 다시 일어날 용기는 낼 수 있게끔 해줘야 하지 않을까?
당신은, 반드시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글을 일고 조금이라도 용기가 생긴다면 당신은 반드시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 용기를 낼 당신도 용기를 내지 못할 당신도 '좋은 사람'이 되지 않아도 조금 뒤에는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에 대해 반드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순간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