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5월 31일에 마지막으로 회사와 이별을 하고, 돌아와 아껴두었던 샴페인도 마시고, 아드레날린과 시원섭섭함이 뒤섞인 채 잠들었다.
그리고 6월 아침, 진짜 백수.
나의 목표는 우아하고 활기찬 오전, 여유로운 오후.
오전에 나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다 마치고, 오후에는 여유롭게 그간 하고 싶었던 일들 (리스트를 미리 만들어 둠)을 하거나 편히 쉬기.
아래는 규칙적인 백수의 미라클 모닝 루틴:
5시 기상, 명상과 독서
6시엔 나가서 조깅 (나이키런 하프마라톤 프로그램 따라 뛰기)
7시 딸내미 기상 시간에 곱게 차려입고 양질의 점심도시락 싸주고 학교 보내기
8-12시, 커피 마시며 우아하게 쉰 후 남은 해야 할 일들 (집안일, 글쓰기, 공부하기 등등) 하기
12시에 나를 위한 맛있는 점심을 차려먹고, 오후부턴 내 맘대로!
6/1일 아침:
미라클 모닝을 다짐하며 5시에 알람을 맞추었으나, 계속 끄는 바람에 겨우 7시에 일어남.
부스스하게 잠옷을 입고 후다닥 아래층으로 내려가 딸내미를 흔들어 깨우고 도시락 싸서 내보냄.
8시, 일단 운동복 입고 커피를 마셨는데 도저히 몸이 움직여주질 않음.
독서나 해야겠다 하고 소파에 누워 책을 폈으나, 마신 커피가 디카페인인지 고대로 잠이 듦.
10시 40분. 와 c, 이러면 점심 먹기 전에 운동을 못하잖아! (간헐적 단식 & 공복 유산소)
헐레벌떡 나가서 뛰고, 샤워하고. 12시 반엔 배가 너무 고프고, 백수 첫날을 보낸 내가 뭐 그리도 안쓰러웠는지 오래간만에 라면 먹기.
충격인 건, 이렇게 게으르게 오전을 보냈는데 오후가 통으로 남았다는 것!
짜증 나는 건, 한 일은 별로 없는데 몸은 피곤하고 무겁다는 것.
아니 백수 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내가 하고 싶던 일과 계획했던 일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이렇게 푹~ 퍼져 버린 거지?
부끄럽게도 이런 일상은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그나마 나이키 런 달리기 프로그램이 있어 사람 구실을 하고, 예정돼있던 최종 면접 (이 회사는 면접을 세 번 본다)이 아니었으면 하루종일 유튜브나 보면서 보냈을 듯하다.
그동안 회사 일 때문에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결국 타성에 젖어 억지로 쳇바퀴를 돌리지 않으면 규모 있는 하루를 살지 못하는 못난 사람이었나?
미라클 모닝 그거 별 거 아닌 거 아니야? 일 못 해서 죽은 병 / 조급증 내려놓고 생긴 대로 살고 퇴사 후 시간도 느긋히 즐기는 게 맞는 거 아냐? 이런 긴 휴가가 또 언제 온다고?
솔직히 아침마다 화장하고 머리하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 너무 좋지 않니?
반년은 쉬기로 했는데 좀 천천히 가자. 면접관이 합격되면 9월부터 나와달라고 하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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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짤로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위로하는 나.
낼모레면 불혹인데, 30대 끝나는 이 순간까지 원래 유혹이 찰랑찰랑 한 거야? 아니면, 내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받은 몸과 마음의 대미지가 너무 커서 회복하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