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떤 생각을 품고 간병의 길을 선택했을까? 각각의 스토리는 모두 다르겠지만 어쩌면 한 가지 불문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사람이라면 이득과 손해가 많든 적든 간에 나름의 저울질을 통해 그들의 길을 설계했을 것이니까 한 방향으로 이어지는 통념이 없다면 간호란건 사실 무진장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 통념은 인류애라고 생각한다.
옷깃도 스치지 않은 사람의 팔다리가 되어주고, 비관과 음울로 무장한 한탄을 들어주고 하는 것은 위대하기 그지없는 의지이다.
물론 이와 같은 자애를 행하는 것도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선의에 찬 과업이지만 내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내 사생활에 침투하여 있는 사람들이다.
병이란 얼마나 루즈하고도 꺼려지는 물질인가. 나와는 일체 감각을 공유하지 않는 타인의 것이라면 더.
나병과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을 생각해 보자. 그렇게 끔찍한 고통 속에서 버려져 있는 그들에게도 손을 뻗어주는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을 것이다.
위인전에 실릴 정도의 사람들도 그에 포함되지만 이런 선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깊은 관계인 가족이다.
물론 내 근시적인 현실은 위의 예시에 미치지는 않지만 그런 이의 곁에 있어주길 선택했다는 것은 충분히 힘에 겨운 일이다. 어쩌면 병과 싸우는 이들보다 더 벅찰 분들에게 나와 같이 병과 함께하는 사람이 취할 스탠스는 무엇일까. 잠깐이지만 앉은자리에서 생각을 해보았다.
대략적으로 추려보니 초연함, 이타심, 침착함과 같은 태도들과 공감능력, 인지력 같은 자각력이다.
가만있어도 힘에 부치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것들을 완벽하게 행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딱 한 가지만큼은 감히 부탁드리려 한다.
아마 공병인들에게 가장 부족할 초연함과 이타심이다. 내가 병에 흔들리는 순간 내 주변인들은 모두 그 네거티브하고도 격정적인 감정에 노출되기에 이른다. 초연한 태도를 가지려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내게서 일말의 희망과 긍정의 위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한번 세상은 색을 되찾을 것이라 감히 예지 한다.
나머지 이타심이란 무엇보다 어려운 것인데.. 이건 솔직히 나도 단언하기 힘든 부분이다.
세계에는 극단적인 경우도 많아 난 항상 최악을 상정하는 편이니 지금도 그에 초점을 맞추고 얘기해보려 한다.
당장에 내일도 명확하지 않아 초조하고 불길해져 가는 몽상에 갇힌 상태에서 나 자신의 삶만을 살아내기도 모자란데 무슨 놈의 이타심이냐 하겠지만, 그럴수록 당신 주변의 사람도 당신과 함께할 시간이 없어지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일깨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서워, 힘들어, 아까워, 이 세 가지에 자신만이 몸을 빼앗기는 것이라는 것도 오만의 일종인 것이다.
다만 그렇게 오만에 잠식되는 데에는 이미 사고회로가 온전하게 기동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책망을 물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프지 않은 분들이 부디 이와 같은 점들을 알아가 주길 바라는 것이다.
아픈 이들에게 설득이란 진작에 필요 없어졌을 터이다.
그렇다면 아픈 자는 때론 이런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보기에 무심코 그대들에게 짜증을 내고 마는 것이라고. 병인(病人)과 동시에 아파하는 이들에게 은연중에 이런 점을 흘려 그 사람이 죽기 전까지 끝없이 찾아올 고통을 나는 덜어내주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