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장례

나에게 치러 주고 싶은 이상향에 가까운 최후

by 휴사






당돌한 자들이 부러웠던 시절. 쉬이 웃음 지을 수 있고

언제나 밝다는 자격이 부여돼 있던, 10대의 나는 정작 미소 지을 때에도 밝아지지 않는 얼굴을

가진 채로 숨만 쉬고 있었다.



자신을 읽어 과거를 잃어가고

무언가 내 힘으로 해야 한다는 무언의 함성에 둘러싸인 채의.

조금이지만 미래에 대해 근본 없는 희망을 품는 게 통용되었던, 20대의 나 굳은 하늘에 내리는 눈과 전혀 동화되지 못하는 사람 중에 한 놈일 뿐이었다.



이전에 내 몸에 배어있던 활기가 가랑비로 조금씩 젖어

옷과 그 외의 모든 것들이 더럽혀져 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지만.

이리 처지기만 하는 날에도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어

힘든 것도, 우울한 것도 전부 나아갈 동력의 초석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30대의 나

내가 보기에도 분명하게 운동에 미쳐있었다.


홑몸임에 외로운 나날을 견뎌내고 있는 티가 팍팍 나게 되어버려

내 모습이 내가 꿈꿔왔던 모습이 아니어서 몸부림치던 날을 감히 들추지는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그 형태를 인정할 줄 아는 기형의 철이 들어버리고야 만 60대의 나 나이를 헛 먹어 몸의 노화 진행도가 내 세대 사람들의 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하나 더하기 하나, 조금씩 의미를 줍고

그것들을 한 데에 그러모아 차곡차곡 행복의 의미를 써나가게 되어

이윽고 언젠가의 미소가 다시 조금씩 익숙해지는, 80대의 나 마침내 초로한 옷이 잘 어울리는 눈빛을 뿜게 되었다



정신만은 여전히 풋내가 가시지 않았지만

어쩐지 힘이 빠져서 예전과 같지 않은 냄새를 풍기는 또 다른 내가 있다.

모든 게 다 빠져나간 것처럼

이전의 형태를 온데간데 찾아볼 수 없게 된 나이지만

그럼에도 쭉 뻗은 시선으로 초연하게 주변을 볼 수 있게 되었고

희미해지는 나날을 더 붙잡지 않고 그런대로 놓아두어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아지게 된, 100세의 나 거쳐왔던 생에서 아마. 가장 싱그러워 보였다.


그랬었던 나를 둘러싼 무수한 내 이름을 가진 그들이

각자만의 꽃으로 날 장식해 주었다.


첫 번째로 놓아진 금매화 한쪽.

두 번째는 개회나무 잎이.

세 번째론 만수국 한 송이가 놓아졌으며

마지막으로 미스티블루 한 더미가 흩뿌려졌을 때

그러모은 두 손엔 대나무 한 단과 가슴팍엔 별꽃 한 송이가 장식되고 나니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러 내 곁에서 발을 돌렸다.


화원과도 같은 내 흔적이 시들 때가 오면 모두에게 잊혀지길 바랐으니

내 장례식에 내가 찾아온다는 건 나에게 있어 너무나도 시원한 최후이지 않을까.




누군가가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사람 된 도리로써 당연히 그 흙탕에서 빼내줘야 한다.
그렇기에 죽음이란 늪과도 같다. 죽어가는 자는 산 사람에게 매달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 손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누구의 손길도 받지 못해 늪에 완전히 빠진다는 것은 진정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죽음은 무無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들은 이 세상에 잔뜩 있다.
살아갔다는 것은 무엇이라도 남겼다는 증거.
무엇이라도 남겼다는 것은 빛나도록 살아왔다는 증거.
그러니 죽은 이는 드디어 멈춰 섰음에 기뻐하며 산 자는 아름답게 흘러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