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란 언제부터 '무형'이 되었는가

폭풍같이 밀려드는 발전이 가려버린 원시적인 감동

by 휴사




우리가 보편적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이란 무엇이 있을까?

그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시, 청각적

정보라는 것은 상식이다.

다음으로 꼬리가 되어 따라오는 것이 촉각, 후각, 미각 등등 추상적인 정보라는 사실이

시각과 청각이라는 정보가 가진 특징인 '뚜렷한 이미지와 세상의 모습대로 정해지는 답'을 오히려 더 크게 만들어준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오감은 시시한 클리셰처럼 우리의 몸에 깊숙이 적응되어 있으니 메마른 몸에 새로운 감각을 전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다.



우리가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정보의 홍수량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는 것은

명백히 위에 제시된 것과는 다른 특성을 띄는 글의 기록이다.

기록은 인류 발상이 낳은 것 중에 가장 미래지향적인 형태를 띠는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하게 된 이유는 요즘 답지 않게 주기적으로 책을 읽으며 언어를 자주 접한 데에 있다.

언어라는 추상적인 대상에 나의 추상을 한번 더 가미하여 평면에 담아내는 작업인 '기록'이라는 행위에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 매력적인 수렁에 내가 깊숙이 갇혔다는 느낌마저 가지게 한다.


당장에 이 글도 책이 주는 전율에 압도된 감정을 가볍게 정리한 결과물이다. 이해타산의 집합체라 느끼는 내가 구태여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드는 글은 참 대단하다.





각설하고

해가 갈수록 글자가 천대받는 것이 느껴진다.

내 주변을 보면 글을 멀리하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로 내포되어 있는지 똑똑히 보이고.

그들이 글을 왜 멀리 하는가에 대한 이유까지 검색하다 보니 무정한 현실을 지겹게 체감하고 있다.

글을 쓴다는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대체로 개인이 느끼는 필요성과 기호의 차이에 따라서 할지 말지가 정해지는 나름대로 어렵게 비치는 행위라지만

글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물어보면 조금의 장문이 주르륵 펼쳐지기라도 하는 때엔 금세 흥미와 집중을 잃는 것이 평범이라 여겨질 정도로 글은 나름대로 박해받는 편이다.

이 같은 현실에서 내가 느낀 바는

결국 이러한 현상이 절대적으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오감이 원하는 것을 풍족하게 채워주는 현대의 기술들이 글자란 구시대적 표현, 단순한 기록의 한 형태라고 느껴지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글자로 쓰인 기록을 구태여 접해야 하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글의 큰 특징 중에 하나인 추상감이다.

'뚜렷한 형태가 없기에 내 뇌가 스스로 가동하여 세상에 없는 입체감에 따른 몰입도를 선사해 주는 점'이 글이 매력적인 이유라고 단정 지어도 괜찮지 않을까?


일례로 난 어릴 적부터 내가 생각하던 것에 답을 정해주는 어른들의 행위가 일종의 모독처럼 느껴졌다.

우리라는 생물이 이렇게 다색을 띠는 존재인데 왜 세상엔 답이 정해져 있는 것들로만 빽빽할까?


그러니 확실히 말하고 싶다

이것은 주입식 교육이라는 한 축에서 새어 나온 일륜적 감정이었다고.

나라는 흔한 생물체를 알리고 싶고, 남기고 싶은 이 감정조차 결국 내 미래에 있어선 쓸모없을 거라는 확정이 되어 혀 위에서 증발했다.

입 밖으로 꺼내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는 느낌을 주는 감정이 어린 내가 세상에 가진 첫 부조리함이었다.


그 어릴 적 기억에 지금에 와서 시인하길 그에 대한 해답은 기록이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나는 글 쓰는 사람 이전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져보니 내 심장이 말해주기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현실에 끄집어내고 싶다는 순수한 자기표현에 대한 욕구였다.

내심 마음 한구석에선 타인이 나만의 것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다양한 감상에 목말라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림과 같은 시각성 매체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자신의 몫을 묵묵히 수행하는 글자는 풍부한 깊이를 내포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표정을 보여준다.


이 표정이 주는 행복이 곧 글자의 멸종을 거부해야 하는. 앞으로의 내가 갖춰야 할 태세라고 생각을 굳히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