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의회는 지난 연말, 23년 안성시 본예산 심사를 하면서 700개가 넘는 사업예산을 삭감했다. 총 392억원에 달했고 이는 안성시 가용예산의 16%에 이른다. 안성시의회는 8명의 의원이 있고, 현재 국민의힘 의원 5명, 민주당 의원 3명이다. 유례없는 예산삭감 사태는 다수당인 국민의힘이 주도했다. 안성시장의 당적은 민주당이다.
깎인 액수는 그나마 계수조정이 있던 날, 민주당 의원들이 사정해서 80억원쯤 덜 깎인 것이다. 계수조정은 의원들끼리 삭감예산을 최종 조율하는 과정으로, 계수조정 회의는 공개되지 않는다.
계수조정 직전 어마어마한 삭감이 있을 거란 소문을 들은 공무원들이 의원실로 득달같이 달려와 이 사업만은 꼭 살려야 한다고 사정했다. 의원실에 그렇게 많은 공무원이 들이닥친 것도 처음이었고, 공무원도 간절한 대목이 있을 수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백 개 사업예산이 처절하게 날아갔고 삭감이 결정된 계수조정은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겨우 5시간 만에 이뤄졌다.
이 사태는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일까? 국민의힘 의원들은 자신들의 예산심사가 불요불급한 예산을 삭감한 모범적인 사례라고 자평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본예산 의결에 동참하지 않는 것으로 저항했고, 자유발언, 보도자료 등을 통해 부당한 예산심사를 성토했다. 시장도 나서서 조목조목 반박하는 긴 기자회견을 했다. 일부 시민들도 비판에 나섰다. 심지어 주민참여예산도 삭감됐으니...
서로의 주장대로 모범적인 예산심사였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만용이든, 결과적으로 안성시 곳간에는 풀지 못한 곡식이 어마어마하게 쌓이게 됐다. 가계는 빚내서 살고 빚내서 재테크도 하는 판에, 관아의 곳간에는 돈이 썩어나고 있는 셈이다.
삭감된 예산보다 더 나쁜 것은 무려 700여 개가 넘는 사업에 대한 예산이 깎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국민의힘이든 민주당이든 어떤 사업의 어떤 예산이 얼마나 삭감됐는지 다 아는 의원이 없다. 목록을 봐야 알 수 있다. 계수조정하던 날, 리스트에 삭감의견이 있는데 어떤 의원이 올렸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어 황당했다.
시의원에 의한 시민 의사의 왜곡
스마트승강장, 버스라운지를 4개쯤 건설하려던 사업도 전액 삭감됐다. 명확한 삭감의 이유는 모르겠다. 삭감이유로 ‘불요’라는 두 글자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사업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미세먼지나 배기가스로부터 벗어나 쾌적하도록, 또 버스가 언제 도착하는지에 대한 스마트한 정보를 받아볼 수 있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 중 다수가사회적 경제적 약자이니 특히 그런 분들이 추위와 더위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의 스마트승강장과 버스라운지였다. 다른 지역에도 있는 그것이 왜 안성에는 ‘불요’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럼 도대체 어떤 사업이 '불요'가 아니라 '필요'인지, 그 대안은 뭔지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심지어 대답할 의무를 진 사람도 없다.
전자투표가 이미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전문가가 아니니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이즈음 이미 공동주택 단위의 전자투표를 지원하는 지자체도 많아졌고, 주주총회 등 전자투표를 인정하는 곳도 많아진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 해킹의 위험 따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 세계 최대의 IT강국 대한민국에서 전자투표가 가능하지 않으리라 여기는 것이 더 어렵지 않나 싶다.
그럼 전자투표가 가능한데도 적극 확대하거나 전면화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그랬다. 음모가 있다고... 즉 전자투표를 하게 되면 디지털에 강한 청년층의 투표 참여가 많아질 것이고, 이는 누군가에게 불리하다는 것. 청년층이 투표를 많이 하면 불리한 정치세력이 누구인지는 전혀 모르겠으나(?) 음모론으로서는 그럴 듯해 보인다.
전자투표 얘기를 하는 까닭은 이번 안성시의회 사태를 보면서 끝 모를 회의가 들었던 까닭이다. 20만 안성시민을 대표해 예산을 깎은 사람은 국민의힘 의원 4명이었고, 그중에서도 삭감을 주도한 것은 소수인 것으로 판단된다. 4명도 안되는 소수의 의원이 20만여 명을 대신해 의사결정권을 행사한 것이다. 물론 예산심사권은 기초의원에게 법적으로 주어진 권리다. 하지만 아무리 물러서도 700건이 넘는 사업 삭감이 시민의 의견을 받든 결과라고 보기는 힘들다. 예산삭감의 가장 큰 이유로 공공연히 받아들여지는 설(說)은 '민주당 시장 발목잡기'였다.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데 하지 않을 이유가 있어?
예산결정권이 시민에게 있었다면 이런 결과가 발생할 수 있었을까? 만약 의회가 심사한 것을 시민이 최종 의결하는 식으로전자투표가 가능했다면 이런 사태가 가능했을까? 직접민주주의였다면, 시민에게 돌아갈 공공서비스의 질보다 정치적 이해관계의 득실이 우선되는 이런 사태가 가능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확신하건데 시의원 8명의 머리보다는 20만명의 집단지성이 훨씬 더 균형적이고 훨씬 더 합리적인 결론을 냈으리라.
그리하여 하고 싶은 말은, 디지털 기술력의 발전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확대가 충분히가능해졌다면, 또 앞으로 더욱더 가능해진다면 대의 민주주의에 기댈 이유가 뭐냐고, 나는 '이른'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정치인은 혐오한다. 시민께 표를 구걸하다가 당선만 되면 거드름 피우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는 그런 정치인의 수를 줄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긴 노동시간에 허덕이는 분들은 열받는 얘기이겠지만, 실상 전체적으로는 과학의 발전으로 사람의 노동시간이 많이 줄었다. 시민이라고 불리울 분들이 정치적으로 관심을 가질 여력이 이전보다 충분하지 않느냐는 얘기다. 정보는 광범위하게 제공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으로 수백, 수천만 시민의 뜻을 종합할 수 있게 됐다. 모든 시민이 기본적이고 균형적인 정보를 제공받은 후 대리인을 뽑는 것이 아닌, 실제 우리 공동체의 굵직한 사안에 대해 수시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사회가 좀더 나아지지 않을까? 그 과정 자체가 민주시민 양성과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만인이 정치인이 되자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