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좋아하는지? 이 질문이 질문으로서 성립을 할까? 지구상에는 70억이 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중 어떤 이를 만나 일생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답변은 달라질 수 있겠다. 놀라운 것은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 돈이나 자신의 지위, 타인의 인정보다는 '사람'에 있다는 어떤 얘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사람,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은 '사람'이란 말은 얼마나 진실일까...
어수선한 성장기를 보낸 까닭으로 사람을 싫어했다. 덕분에 TV프로 중 유일하게 거부감 없이 보는 것이 ‘나는 자연인이다’였다. 매회의 주인공들은 삶의 실패와 좌절을 계기로 숨어들고, 그게 사람 하나 없는 자연 속으로의 고립이란 게 매우 마음에 들었다. 가난하고 높고 쓸쓸한 삶. 하지만 단순하고 고요한 삶. 나는 그런 삶을 지향한다고 여겼다. 백석의 시에 나오는 '굳고 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디 먼 산 바우섶에 외로이 서서 눈을 맞는 갈매나무' 같은 삶을 지향한다고 여겼다. 물론 그게 그저 내 자아에 대한 환상일지라도...
선거에 나서게 되면서 도대체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는 내게 왜 이런 길이 펼쳐진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짚이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사람을 싫어한다는 너의 감정과 생각이 '진실'인지 확인하라는 것. 도망만 가지 말고 사람의 마을에서 한번은 부대끼고 살아보라는 명령... 무서운 명령... 제일 하기 싫은 숙제를 어떻게 그렇게 딱 짚어서 내는지...
호의가 가면 호의가 오고... 수행 같은 거리인사
지난해 5월 민주당의 기초의원 후보로 결정되고 거리인사를 시작했다. 피켓을 들고 도로로 나가 최대한 깊이 허리를 숙여 지나가는 차량에 인사하는데, 첫날 심각하게 현타가 왔다.
‘아,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자의식이 들고 일어나 와글거렸다. 당장이라도 그만두라는 자아의 비명... 그러나 일은 저절로 굴러가 매일 너댓 시간 거리인사하며 선거운동 기간을 보냈다. 어느 사이 나는 내 정수리를 향해 달려오는 차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출근길엔 "좋은 하루 되세요", 퇴근길엔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말을 중얼거리는 것은 리듬을 맞춰주는 효과도 있었고 자의식을 잊게도 해주었다. 놀랍게도 며칠 지나지 않아 선거운동 중에 거리인사 하는 그 시간이 제일 좋았다. 수행 같았다.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듯, 얼굴 모르는 누군가들을 향해 인사를 하는 것. 나쁘지 않았고 인사말처럼 좋은 기운이 건너가는 것 같았다. 내가 세상을 호의로 대하니, 사람들도 나를 호의로 대한다는 걸 느끼는 시간.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생겨먹은 것이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궁극적인 진실을 더 궁금해한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최후에 받아들여야 하는 옳은 삶인지, 지구를 병들게 만드는 인간이라는 종의 멸을 기원하는 것이 옳은지, 그에 대한 답을 찾는 족속인 것이다.
답을 찾는 일이 쉬 끝나지는 않겠다.
내 편이 되어줄 정치인
시의원이 되고 나서 스트레스 받는 일 중 하나가 행사장 쫓아다니기였다. 안성에서 40대 여성은 그것이 시의원이든 나발이든 상관없이 어르신들께 매우 만만한 존재로서 행사장에서 만나는 보통의 이장님들과 주민분들은 나를 보고 흔히 이렇게 말하셨다.
“요즘 왜 이렇게 안 보여?”
“시의원이 열심히 다녀야지? 선거 끝났다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겨?”
일단 깔고 시작되는 이런 말들이 솔찬히 스트레스가 됐다. 한 번은 면민 체육대회 개막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오후에 갔는데, 한 어르신으로부터 10분쯤 호통이 났다. 다른 일정이 있었다는 얘기 따위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리고자 ‘지역구 회의나 행사를 다 쫓아다니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댓글은 이러했다. ‘그렇더라도 중요한 행사에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내 지역구는 8개 읍면동이고, 시의원이 그 모든 곳의 행사장을 매일매일 쫓아다니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민원을 해결할 수도, 예산심사 자료를 볼 수도, 조례를 만들 수도 없다. 그래도 유권자들은 시의원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어디서 놀고먹는다 생각하시는 듯하다.
행사장을 아예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다닌다고 칭찬을 받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어느 가을날, 시골의 한 초등학교에서 면민체육대회가 열렸다. 그날 하루는 그곳에 머물고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주말이었고 주민분들이 주는 낮술을 마셨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 사이, 나를 본 주민분들은 반색을 하며 얼굴을 들이대고 내 귀에 마을의 온갖 얘기, 안성의 온갖 얘기를 전했다. 초면이라는 어색함은 없었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나는 사람들이 하고픈 말이 엄청 많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가만히 그 얼굴들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깨달았다. ‘아, 이분들은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구나. 시의원이라는 그 알량한 권력이라도 붙들고 호소하고 싶었던 거구나. 내 편이 돼줄 정치인이 필요했던 거구나...’
그랬다. 그분들은 놀랍게도 정말, 내가 보고 싶었던 거였다!
아득했다. 약한 잎들이 떠올랐다. 약해서 기댈 수밖에 없는 초식동물 같은 존재들... 기초의원이라는 알량한 힘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들... 저 위의 나랏님이나 국회의원님들은 몰라도, 시의원인 너는 자주 보고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냐는 호소...
오... 다시 현타가 왔다. 보고 싶어하다니... 만날 때마다 ‘왜 안 보이냐’는 타박의 진심은 그런 것이라고 믿어야 했다. 그게 옳은 듯했다. 그리고 세상은 믿는 대로 실현되니 내가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부터 보고 싶은 시의원이 되기로 한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