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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혀노블 Aug 06. 2024

비자발적 퇴사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

며칠만 더 있으면 회사와 작별이다.


이제 더 이상 아침부터 하루를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


버스를 놓칠까 봐 뛰지 않아도 되고,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붙잡지 않아도 되며, 파란불이 점멸될 때 불안해하며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아도 된다.


출근할 일이 없으니 한동안 몸은 편해지겠지만 이내 마음은 한없이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 날짜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오자 가까스로 잊고 지냈던 걱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재취업을 못하고 결국 나이만 먹게 되면 어쩌지?"


"새롭게 이직을 하더라도 적응을 잘 못하면 어쩌지?"


"나이가 적지 않고 경력도 있는데 새로운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가슴 한편에 미뤄두었던 걱정들을 실타래처럼 풀어놓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냥 회사에 육아휴직을 내고 8개월은 버텨볼걸 그랬나? 다시 복직하면 다른 길이 생길 수도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다. 8개월 뒤에 돌아가더라도 신임대표는 나를 내보내려 했었기 때문에 내가 껄끄러울 것이고 그럼 나는 나이만 한 살 더 먹은 채로 또 한 번 권고사직서를 받아야 할지 모른다.


"만약 내가 2년 전 기획 팀장이 아닌 팀원을 채용해 달라고 요구했다면 나는 지금쯤 팀장으로 회사에 남아있게 되었을까"


아니다. 회사는 나와 마케팅 팀장님을 저울질했을 테고 마케팅팀은 영업부서이니 마케팅 팀장님이 회사에 남게 되었겠지...


나의 선택이 돌고 돌아 지금의 상황을 만들게 된 것이라는 생각에 과거의 내 선택들을 후회하며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하고 있었다.


정답 없는 문제의 최대 근삿값을 맞추려는 수고를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후회'를 곱씹으며 부정적인 경험에 몰두다.

우리는 특정한 경험을 기억할 때, 그 경험의 ‘시간의 길이’는 무시하고 ‘가장 강렬한 순간’과 ‘가장 마지막 순간’의 평균에 가깝게 떠올린다고 한다.

경제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이를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이라고 지칭했다.

‘절정’을 뜻하는 피크(peak)와 ‘마지막’을 뜻하는 앤드(end)를 결합된 신조어다.

-브릿지 경제 23년 5월 9일 19면 기사 중에서-

대니얼 카너먼이 실험을 통해 증명한 대로 나에게 다른 기억들은 다 제거되고, 가장 강렬하고도 최근 편향적인 비자발적 퇴사의 경험만이 남았다.


퇴사의 고통이 나를 계속 작아지고 불안하게 만들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결론은 어떻게 해도 지금과 같았을 것이고,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은 전혀 내 탓이 아니야. 나를 탓하지 말자. 누군가를 탓하고 싶다면 차라리 회사 탓을 해."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나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 때마다 로움에 매몰되지 않도록 마음을 컨트롤할 방법이 필요했다.


자기 계발서나 에세이 글들접하며 작가들은 보통 세 가지를 많이 하는 것 같는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찾아 읽은 글에서는 '독서 운동, 그리고 글쓰기' 자주 등장했다.


'독서와 운동, 글쓰기'는 왜(Why) 나는 비자발적으로 회사에서 퇴사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자괴감에서 벗어나 어떻게(How)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를 알려주는 방법이었다.


'독서'는 불안한 심신을 진정시켜 주는 안정제 같았다.


책을 읽다 보면 불안했던 마음에 '치유와 안정'이라는 약효가 빠르게 퍼졌고, 우울한 감정도 긍정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었다.


좋은 글귀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고, 입으로 읊조렸을 뿐인데 마음이 편안해지는 정적인 과를 가져다주었다.


'운동'은 너무 귀찮아서 마음을 굳게 먹고 실행으로 옮겨야 했만 기분을 전환하는 데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운동을 하지 않을 이유가 생기면 반색했고,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해 미뤄두면 꼭 당장 해야 할 빨래나 설거지를 쌓아둔 듯 찝찝했다.


고강도 운동을 할 때 너무 힘들어서 그만 쉬고 싶은 마음이 들면 이 시간도 버티는데 퇴사 따위 못 버틸 내가 아니라며 정신줄을 잡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동안 현재의 괴로움도 잊혔다.


나는 원래 땀 흘리면서 운동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 편이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면서 땀샘이 폭발할 때, 마음의 묵은 체증도 같이 분출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글쓰기'도 나에게 막연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활동들 중에 하나였다.


나에게 글쓰기란 육아 일기를 제외하고, 기획서나 보고서를 쓸 때만 필요한 것이었다.


미사여구를 빼고 전달 사항만 간략히, 맥락에 맞도록 핵심만 적으면 되었다.


더 이상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는 나에게는 정 반대의 글이 필요했고, 그래서 무작정 에세이 형식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잘 쓰기 어렵고, 잘 읽히는 글을 쓰기란 더 어렵다는 사실 알게 되었다.


쓴 글을 다음 날 다시 읽었을 때, 문맥이 부자연스럽거나 표현이 어색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한참이 다시 지나 그 글을 읽었을 때는 너무 완곡한 표현이 보였고, 좀 더 그럴듯한 단어를 고민하게 되었다.


꾸준하게 글을 쓰다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책에서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쓰는 연습을 권장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한 가지 더, 내가 글로 풀어낸 경험은 휘발되지 않 남아 있었다.


경험을 글로 쌓다 보니 글이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재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와 운동과 글쓰기' 왜 마음의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생각해 보니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자존감이 쌓이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도움이 되는 듯했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잘 지킬 때마다 나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이것이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다.


부지런하게 내 할 일을 하는 나.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나.


어제와 오늘의 약속을 지키는 내가 되었을 때, 비로소 퇴사의 고통은 사라지고 자신감도 다시 높아지게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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