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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혀노블 Aug 01. 2024

권고사직 후 열흘 만의 회사 출근

잠수를 타도 모자랄 판에 백업이라니...

권고사직 후 열흘 만에 회사에 출근했다.


신혼여행으로 일주일간 부재중인 동료의 백업을 맡다.


물론 사의 부탁을 들었을 때, 내가 왜 그런 것까지 해야 하느냐고 따져 묻고 대차게 돌아섰어야 했다.


백업을 담당한 업무는 내 주 업무도 아니었다.


분고분 회사의 부탁을 들어준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팀장님에게 쓰이는 마음 때문이었다.


팀원이던 나와 디자이너도, 팀장님의 고충을 제일 잘 알아주던 마케팅 팀장님과 개발자도 이제 없다.


하루아침에 마케팅팀과 기획팀은 해체되었고, 팀장님은 남아있던 대리 한 명과 묶여 '기획마케팅팀'이 되었다.


팀장님 혼자 마케팅 업무까지 도맡아 하며 고생할 눈에 선했다.


결정권자는 칼춤을 추었 남은 사람들은 칼춤이 휩쓸고 간 자리를 치고 있었다.


비용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직원들을 권고사직 시키고 남은 직원들에게 나간 사람의 몫까지 일을 시켰므로...


자른 사람이 업무 공백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


일손이 모자라면 자신이 전화받고, 전표 입력도 하겠다 호기롭게 말했다던 신임 대표의 발언이 어디선가 들리는 듯했다.


언제는 뭐 이 회사가 공정했나? 권고사직 대상자도 합리적인 근 없이 결정되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회사에서 3년 연속으로 인사평가를 높게 받L대리는 권고사직을 당한 반면,


항상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어려운 업무는 꺼려해서 인사평가를 낮게 받던 J대리는 회사에 남았다.


칼춤은 신임 대표가 추었지만 칼자루의 방향은 P이사가 정해주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P이사는 업무의 성과나 기여도는 상관없이 평소 목소리가 컸던 나도, 그 L대리도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므로...


"역시 그만두길 잘했네." 어지럽던 마음이 다시 한번 리되는 듯했다.


열흘 만에 출근한 회사는 변함없이 그대로였고, 출근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나만 변한 것 같았다.


꼬박 이틀에 걸쳐 인수인계를 받았지만 업무는 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꽤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갔다.


익숙지 않은 툴을 사용해야 했고, 인수인계 당시에는 생각지 못했던 예외상황들을 처리하느라 쉴 틈 없었다.


권고사직을 당해놓고 월급루팡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자존심도 없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다니...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상황인가 싶기도 했다.


평소보다 바쁜 9시간을 보냈고, 예상보다 늦 퇴근 했다.


열흘 쉬다 하루 출근한 것뿐인데 몹시 다.


회사에 앉아 바쁘게 하루를 보내는 일은 별일이 아닌 게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9시간을 오롯이 녹여내고, 바쁘게 보냈을 때 비로소 퇴근해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다.


집에서 보내는 하루와는 사뭇 달랐다.


오랜만의 출근 나에게 전해준 메시지는 권고사직 이후 열흘동안 나는 돈을 버는 대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벌것이다.


항상 종종 거리며 목적지에 다다르기에 급급했던 나는 눈 뜨면 출근하기 바빴고, 퇴근하면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회사 건물 밖으로는 좀처럼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지금은 릴없이 밖을 쏘다닌다.


하늘도 한 번 올려다보고, 나뭇잎 사이를 간질이는 햇살에 눈도 한번 찡그려 보고, 미세 먼지 없공기폐에 한껏 담아 본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에 눈길이 가고, 나뭇가지에 돋아난 새싹 대견하게 느껴졌다.


잠시 멈추었더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내 주변의 아름다움이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주어진 과업을 해내고 마는 자연을 감상하고 있자니 숙연해지기도 했다.


퇴사가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변하게 만드는 걸까?


그 주의 출근을 계기로 깨달은 바가 있다면 나를 위한 간을 허투루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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