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없이 사는 것 같아 보여도 한 두 가지 걱정쯤은 품고 산다.
걱정의 크기를 가늠하는 척도는 상대적이라 자칫 마음대로 재단할까 우려된다.
아이의 걱정거리도 내 걱정거리 못지않게 그 크기가 꽤 커 보였다.
함께 어울려 노는 친구가 말을 툭툭 내뱉을 때마다 어떻게 대꾸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그 친구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자신은 용기가 없어서 그 친구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고 한다.
'그런 부분은 꼭 나를 닮았네.' 생각했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종종 억울함도 느꼈지만 용기가 없어 말을 아꼈었다.
아이에게 "세 번 정도 생각하고, 그래도 말해야겠다 싶을 때 할 말은 해."하고 얘기해 주었다.
아마 아이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가 물었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수록 용기가 생겨서 말할걸 그랬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나이가 들수록 용기는 더 줄어든다.
용기가 아니라 후회가 늘어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 하고 싶은 말을 적절한 때에 하지 못하면 마음에 켜켜이 쌓인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뒤에야 그때 내가 왜 그 말을 하지 못했지? 하면서 뒤늦은 후회를 한다.
상대가 서운하게 했던 것들을 마음속에 한가득 담아두었다가 한순간 폭발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이가 나처럼 그런 후회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상대에게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말하고 후회가 적은 삶을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설령 그 말을 꺼내어 오히려 그 친구와 서먹한 사이가 되더라도 말이다.
괜찮은 친구임에 틀림없다면 잘못한 점은 사과하고, 오해가 있었다면 풀자고 말할 것 이기에...
내 아이에게 벌써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생겼다니 나도 덩달아 걱정이 느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일 당장 친구를 만나서 얘기를 꺼내볼 거야?" 물으니
"엄마,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나도 다 생각이 있어요." 한다.
걱정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어 걱정을 하나 더 얹을 뻔했는데 의기소침해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나는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넌 용기 있는 아이야, 씩씩하게 얘기할 수 있을 거야. 친구에게 네 생각을 말해."
아이는 나보다 더 쉽게 걱정을 툭툭 털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걱정이 한없이 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퇴사 이후의 기약 없는 생활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회사 밖은 지옥이라던데 이런 게 재미없는 지옥인가?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우연히 보고 피식했던 짤이 떠올랐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나요?
'예'
그렇다면 왜 걱정을 하세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나요?
'아니요'
그렇다면 왜 걱정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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