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다정함을 꺼내볼 시간
다정한 것이 좋다. 정확하게 어떠했으면 좋겠다고 그려놓은 다정함의 원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기준은 있다. 언제나 다정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만 하면 방해하듯 툭, 하고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기억 하나. 이걸 웃긴 사연이라고 해야 할지, 슬픈 사연이라고 해야 할지, 말도 안 되는 흑역사라고 해야 할지 구분 짓기 어렵다. ‘세상에 이런 일이’나 ‘컬투쇼’에서나 들을 만한 사연 정도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어라 정의 내리기 퍽 난감하지만 나는 거기에 남몰래 ‘다정함’이라는 스티커를 붙여둔 이야기.
미리 밝히자면 이건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다. 때문에 나는 이 익명의 사연자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단 하나의 에피소드가 익명의 A 씨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다.
A 씨는 오랜 기간 사귀었던 연인과 이별한 후, 생각보다 멀쩡한 스스로에게 놀랐다고 한다.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눈물로 삶이 얼룩지지도 않았다. 평범하고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문제는 예고하지 않고 닥쳤다.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안심하고 있던 A 씨는 생각지도 않은 장면에서 오열하듯 눈물을 터뜨렸다. 안다. 누구나 한번쯤 그런 경험들 있지 않나. 나는 아침에 깨어서 눈을 뜨자마자 미친 듯이 울어본 적도 있고, 버스에 올라타며 교통카드를 찍다 말고 눈물이 나와 다급히 하차한 적도 있고, 샤워를 하다 말고 머리카락에 샴푸를 덕지덕지 묻힌 채로 엉엉 무너져 내린 적도 있다.
A 씨의 사연에 견주자면 명함도 못 꺼낼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그(녀)가 갑작스레 눈물이 터져 나온 건 바로 화장실이었다. 그것도 거나하게 대변을 보고 난 직후였다.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 그 순간 목 놓아 펑펑 울었다고 한다. 어째서 그(녀)는 그 순간 이별의 쓰나미로부터 대피하지 못한 채, 온몸으로 슬픔을 받아냈던 걸까.
연애 기간 동안 A 씨의 연인은 그(녀)가 대변을 보고 나면 자신이 용변을 처리해주고 싶어 했다. (워! 여기서 잠깐.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의 표정을 안다. 괜찮다, 나도 그런 표정으로 이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세상에는 상상 이상으로 다양한 형태의 애정 표현들이 있고, 서로가 합의한 상황이라면 이상하지 않은 사랑 표현도 있을 수 있다고 받아들이고 들어주길 바란다.) 처음에는 뜨악했지만 한 번이 어려웠지 그 다음은 쉬웠다. 함께 있을 때 대변을 볼 일이 얼마나 많겠나 싶기도 했고, 한두 번 그러다 말 거라 생각했다. 정성껏 용변을 처리해 주는 상대방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했다. 오랜 기간 연애를 하는 동안 그것은 둘 사이에 루틴으로, 애정으로, 일상으로 녹았다.
문제는 이별 후에 터졌다. 어느 날 A 씨가 화장실에서, 조금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형언할 수 없는 깊이의 눈물을 쏟아낸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다정함’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입에 담기도 더럽고 변태적인 행위에 무슨 과장된 서사를 갖다 붙이느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나는 이 독특하고도 생경한 사연 앞에서 ‘순수한 다정함’을 떠올렸다. A 씨의 눈물은 그 행위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나 슬픔을 의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독특하고 별스러운 행위에까지 녹아있었던 상대의 마음이, 원초적인 수준에 가까운 크기의 사랑이, 그 모든 무게의 다정함이 그(녀)를 뒤덮었을 것이다.
다정한 것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다정함은 이 A 씨의 사연과 닮아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행위 자체의 달콤함이나 따뜻함도 중요하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행위에 담긴 ‘마음’이 있다. 그 둘이 어떻게 별개일 수 있느냐 묻는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답하고 싶다. 한없이 달콤하고 친절하게 행동해도 내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다. 반대로 한없이 데면데면하게 굴어도 순식간에 나를 사르르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경우도 있다. 나는 후자의 경우 상대의 다정함에 돌연 사랑을 느낀다.
첫 데이트에 배가 아프다고 다짜고짜 화장실로 뛰어간 남자. 여자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약국에서 지사제를 사서 그 앞을 지켰다. 부끄러움을 털어내며 화장실에서 나온 남자는 그 여자의 손에 들린 약봉투를 보며 당황스럽게도 사랑을 느꼈다고 했다. 이건 나와 내 남편의 첫 데이트 이야기다.
신혼여행, 현지인들만 찾는 누드 해변. 바닷가 정 중앙에서 물살을 타고 신나게 노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온 여자.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다 받아 줄 테니 바로 지금이라고 신호를 보낸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여자는 사랑을 느낀다. 이것도 나와 내 남편의 신혼여행 이야기다. 어쩐지 하나같이 용변과 관련된 이야기라 미안하지만 A 씨 사연의 위력이 불러일으킨 점화효과라고 생각하자.
그런 내가 행동과 마음이 동시에 달콤하고 따뜻한 상대를 만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말해 무엇하랴. 그야말로 전우주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런 경험이 있냐고? 있다. 정말로 그런 상대를 만났다. 그건 단 하나뿐인 보물, 나의 아들이다.
접해있는 생활 속에 다정함을 온몸으로 쏟아내는 사람도 특별히 없고, 누가 부러 자리에 앉혀놓고 다정한 행동이 무엇인지 알려준 적도 없다. 유전자에 새겨진 다정함은 더더욱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아이는 처음부터 다정함이 DNA에 단단히 탑재된 상태로 내게 왔다. 이 시대의 진정한 로맨티시스트를 꼽으라면, 세상의 다정함이라는 단어를 모아 사람을 만든다면, 그건 바로 이 아이일지도 모른다.
“엄마, 나는 엄마 중독이야. 자꾸만 엄마 생각이 나고 계속 엄마, 엄마 하잖아.” 말을 하기도 전부터 몸짓으로 다정함을 쏟아내던 아이였다. 말을 하고 나니 더 짙어진 다정함에 정신이 어질하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도 하던데. 빚이 있었다면 이 아이는 말 한마디로 수 백, 수 천억은 뚝딱 해치웠을 거다. 눈길 하나, 손길 하나에도 정이 뚝뚝 흐른다. 움직이는 발걸음마다 다정함이 진득하게 묻어난다. 어제는 저보다 훨씬 큰 어른이 뒤이어 오는데도 오히려 제가 크고 무거운 백화점 문고리를 힘껏 붙잡고 기다리고 있다. 머쓱해진 상대가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자 여유롭게 눈인사를 하며 바통 터치를 한다.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다정다감 센서가 365일 불철주야 바쁘게 돌아간다. 한 달 전쯤, 길가에 붙어있었던 강아지를 찾는 현수막을 두고두고 되새기며 그 아이들의 안부를 걱정한다. 이웃 주민들과 삼삼오오 모여 식당으로 향하는 길, 한 아이가 뒤떨어져 걸으면 잠시 멈추거나 속도를 줄인다. 눈길로 아이들을 쫓으며 함께 걷는다. 그러니까 단지 내가 엄마라서, 부모라서 이 아이로부터 어떤 특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하는 뜻이다. 누구든 이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나면 때때로 어딘지 모르게 달큰한 내음이 온몸에 베인다. 그것이 이 아이가 전하는 다정함이다.
핵심은 이거다.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 특별히 말만, 행동만 하지 않는다. 다정한 말을 할 때는 그보다 더 다정한 눈길이 한 발 앞서 상대에게 가 닿는다. 다정한 행동을 할 때는 소리 없는 말들이 쉼 없이 달려와 따라붙는다. 예상치 못한 공간, 시간에 이 아이가 덜컥 내놓는 보물 같은 다정함에 나는 속절없이 백기를 들고야 만다.
사람마다 제각기 다정한 구석들이 있다. 그것은 연인의 용변을 해결해 주는 형태로도, 만난 지 얼마 안 된 상대의 건강을 염려하는 행동으로도, 달콤한 사랑 표현으로도, 사소한 예의로도, 깨알 같은 마음 씀씀이로도 피어난다. ‘순수한 마음’이 가득 담긴 다정함이 좋다. 누군가 ‘친절한 건 단지 매너가 좋은 거고, 다정한 건 상대를 웃게 만드는 거’라고 하더니 그 말이 딱 이다. 오늘은 우리 모두 각자의 다정함을 꺼내어보자. 서로 한 번씩, 포근하게 웃을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