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값이 없는 수. 전혀 없음, 혹은 텅 빈 상태. 무엇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일까. ‘결핍’과 ‘무(無)’는 같지 않다. 이 작은 언어의 차이가 주는 무게는 생각보다 크다.
고대에는 ‘0’이 없었다. 수학적으로는 단지 공백, 부재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7세기 경, 인도의 브라마굽타(Brahmagupta)가 수 체계를 새로 정립하며 비로소 ‘0’이 탄생했다. 표현할 수 없었던 세계 하나가 열린 것이다. ‘없음’을 ‘존재하는 수’로 바꾼 순간. 제로는 창조의 수이자 개념의 전환점이 되었다. 없음을 시작점으로 받아들인 것은 거대한 혁명이었다. 그 변화는 물리적 질서뿐 아니라 인식의 틀을 바꾸었다. 우리는 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모든 것을 세운다. 제로는 실패가 아니라 준비다.
나는 매번 비어 있는 종이 앞에 앉는다. 제로의 세계가 열린다. 글쓰기는 언제나 제로에서 출발한다. 페이지는 비어 있고, 나는 아직 침묵을 지킨다. 텅 빈 공간은 그 무엇보다 고요하고 강력하다. 백지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무엇이든 쓸 수 있는 자리다. ‘없음’으로부터 ‘있음’을 끌어오는 내가 있다. 진짜 문장은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
백지 앞에서 누군가는 무서워하고 누군가는 거침없다. 나는 때때로 제로의 세계 앞에서 가장 진실한 나를 만난다. 제로는 나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쓰게 만드는 존재임을 안다.
나는 오늘도 제로에서 시작한다. 말이 없는 자리에서 나만의 문장을 아로새긴다. 텅 빈 자리를 채워가는 이 말들은, 비로소 온전한 나의 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