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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위한 세계

by 밤비


달력을 펼쳐 남은 칸을 세어본다. 이번 여름, 우리 가족은 베트남 푸꾸옥으로 떠난다. 최근 몇 년 간 우리가 떠난 모든 여행지마다 물, 더위, 수영은 한 세트처럼 따라다닌다. 한 번 물에 들어가면 좀처럼 나올 생각을 않는 아들과 나, 우리 둘의 물 사랑 때문이다. 아무리 습하고 더워도 괜찮다. 물속에서만큼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물 밖에서도 누리는 나만의 달콤한 자유도 있다. 기존 생활반경에서는 망설이다가 옷장에 고이 넣곤 하는 옷차림을 휴양지에서는 자연스럽게 꺼내 입는다. 팬티인지 바지인지 구분이 힘든 쇼츠, 끈이 없는 게 낫지 않나 싶은 민소매 튜브탑, 주요부위만 간신히 가리는 타이트한 수영복, 몸의 곡선이 도드라지는 재질과 라인의 원피스 ... 새카맣게 그을린 어깨를 모두 드러내도, 밥을 잔뜩 먹고 톡 튀어나온 아랫배가 존재감을 과시해도 아무렇지 않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수영복 차림만으로도 이곳저곳을 편안하게 누빈다. 왜일까? 단지 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그 어떤 형태의 나여도 괜찮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는다. 여기선 모두가 그렇게 입는다. 아니, 모두가 서로를 유심히 바라보지 않는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 시선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시선에 ‘의미’가 없었을 뿐.


한국 사회에서의 복장 규율은 외현적으로는 자유에 내맡기는 것 같지만 실상은 퍽 갑갑하다. 무수한 시선이 따르고 평가가 따른다. 단순 T.P.O.(Time, Place, Occasion)를 넘어선 검열에 가깝다. 보는 것과 판단하는 것은 전연 다른 행위다. 여행지에서는 그 누구도 나의 팔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셀룰라이트도, 튼 살도, 나이도, 체형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엄마, 교수, 딸, 여자라는 역할이 붙지 않는다. ‘잘 보여야 한다’는 자기검열이 희미해진다. 여행지에서 나는 더 이상 ‘누구의 누구’가 아니다.


신혼 여행지였던 푸켓에서 처음으로 느꼈다. 자신의 몸매나 연령에 관계없이 멋진 비키니를 입고 ‘수영’이나 ‘해변 산책’ 그 자체를 즐겼던 사람들. 내가 무엇을 입고 있고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걸 즐기느냐가 더 중요해보이던 몸짓들. 그 곁에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자유를 동경하면서도 잔뜩 움츠러든 내가 있었다.


커버 업 셔츠를 입지 않고 해변을 걷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단 번에 되지는 않았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다. 몇 번의 여행이 쌓여가던 어느 날, 나도 그들 곁에서 그렇게 걷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용기가 내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그 곳의 태양은 내 몸을 평가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치유였다. 일시적인 자유 안에서,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은 홀가분함 이상의 무엇이었다. 편안해진 만큼 기존의 내가 옅어진다. 기준도, 경계도 모호해진다. 익숙한 판단의 잣대들이 사라진 풍경 속에서 나는 다시금 나를 더듬게 된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 돌아보게 된다.


짧은 자유를 만끽하고 여행지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익숙한 시선들이 나를 따라붙는 걸 단숨에 느꼈다. ‘아무도 너한테 관심 없어’라고 믿고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저 엄마, 이번에 회장 그 엄마 아니야? 하천에서 달리던데?’, ‘우리 교양 교수님 아니야? 맞지? 화장 안하니까 못 알아보겠어.’, ‘저 사람은 맨날 옷을 갖춰입더라. 예뻐 보이긴 한데 좀 삭막하지?’, ‘어? 나 저 사람 경찰서에서 본 적 있어.’ (실제로 내 귀에 들어왔던 나에 대한 평가나 판단을 각색한 표현들이다.)


처음에는 이 곳과 저 곳의 다른 세계를 구분했다. 이 곳과 저 곳을 넘나드는 것이 좋았고, 마치 본캐와 부캐가 있는 세상에 접속하는 것 같은 기분도 즐겼다. 몇 년이 지나자 두 세계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저 곳에서의 내가 이 곳에서도 살아 있었다.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 모든 시선과 평가로부터 자유롭던 내가 남아 있었다. 낯선 도시의 길 위, 무명인으로 살아본 기억은 내 안에 작은 쉼표처럼 살아 숨 쉰다. 잠시라도 평가받지 않았던 몸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 기억은 결코 깨지지 않는 단단한 결계가 되어 나를 무너지지 않게 만든다. 가끔은 그 자유로운 세계의 나를 떠올리며, 익숙한 세계의 시선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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