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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대신에

by 밤비



답하기 어려운 주제들이 있다. 로또 1등, 30년 뒤의 나, 노후, 소원 같은 것들. 그 질문들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걸 느낀다. 소멸할 것만 같은 아득함과 동시에 뭐 어쩌라고? 하는 허무함이 번갈아 밀려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진짜일 필요도 없고,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으며, 그냥 가볍게 아무거나 툭 던져도 될 텐데. 자꾸만 입이 다물어진다. 복잡하고 어려운 마음이다.


그 모든 것들은 공허하다. 특히 소원이 그렇다.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은 많지만 그것들은 모두 내가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것들이다. 운이나 기적을 담아 염원해야 할 정도의 일은 내게 없다. 모르긴 몰라도 꽤 평탄하게 살아온 모양이다. 제발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순간조차 없었던 인생이 아니던가.


아주 오래 전, 무대에 오른 경험이 있다. 사슴 역할이었다. 대사라고는 토끼, 곰과 함께 외치는 한두 문장이 전부였던, 이름 없는 동물. 그 때 가슴 한 켠에서 불꽃이 일었던 걸 기억한다. ‘주인공이 되고 싶다. 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싶다. 박수와 환호가 내게만 쏟아지면 좋겠다. 내가 반짝반짝 빛났으면 좋겠다.’ 물론 그 마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비밀보다 더 깊숙한 욕망이었다.


그 이후로 다시 무대에 오를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겐 ‘연극배우’라는 단어가 여전히 갖지못한 어떤 빛으로 남아있다. 버킷리스트를 쓸 때면 언제나 이 연극배우가 존재감을 과시하며 자기 자리를 하나 꿰어찬다. 꼭 연극배우가 아니어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많을텐데 영화배우도, 아이돌도, 연예인도, 유튜브 크리에이터도, 모델도 소용없다. 실시간으로 오가는 호흡과 눈길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연극배우여야만 한다. 삼십대 후반의 내게도 여전히 흠처럼 남아있는 신기한 욕망이 아닐 수 없다.


버킷리스트는 버킷리스트일 뿐. 연극배우가 소원은 아니다. 이유는 단순하다. 무대가 아니어도, 조명이 나를 비추지 않아도, 내 인생의 주인공은 결국 나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강의하면서 학생들이랑 눈을 맞출 때도, 글을 쓰면서 한 줄의 나를 건져 올릴 때도, 아이랑 웃으며 하루를 채울 때도 나는 빛나는 중심에 있다. 이걸 깨달은 순간, 연극배우는 직업이자 경험으로서 ‘언젠가 해볼 수 있으면 좋은 일’로 자리 바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소원 하나만 말해봐!” 하고 누군가 재촉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거창한 무대나 조명, 관객은 없어도 좋으니, 내가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 오늘이 오래 이어지길. 그게 내 소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목숨을 부지하게 해달라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소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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