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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가 자꾸 눈에 밟혀서요

by 밤비



주말 저녁시간.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오랜만에 쟁취한 개인 시간, 어둠을 즐기며 먼 거리를 이동했다. 유명 강사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기대한 것 이상으로 분위기도 내용도 좋았다. 그런데 집중이 안 된다. 강연자가 문제가 아니다. 커다란 화면에 자꾸만 눈이 간다. PPT. 그래, 저게 문제다. 아니, 내 눈이 이상한 걸까?


자동화된 처리과정이 나를 괴롭힌다. 커서 한 칸 띄운 것과 두 칸 띄운 게 귀신같이 튀어 오른다. 글자 아래 baseline이 맞지 않으면 줄이 삐뚤하게 보이고, 이미지 간 정렬이 1mm만 틀어져도 현기증이 난다. ‘Ctrl+G로 한 번에 묶어서 개체 정렬만 해주면 되는데’ 같은 생각은 애써 삼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본문 글자 크기가 28pt였는데 다음 슬라이드에서 갑자기 30pt가 되면 이유가 있는지 찾게 된다. 물론 그런 이유가 있었던 적은 거의 없다. 없는 걸 찾자니 자꾸 집중이 흩어질 수 밖에.


대학 강의 10년 차. 내 직업병은 ‘매의 눈’이다. 강단에서 수백 명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다 보면 눈썰미가 좋아지느냐? 내 경우엔 아니다. 강의 자료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다 만드는 억척스러운 성실함을 무기 삼아 경력을 쌓았다. 무수한 PPT 슬라이드를 만들다 보니 ‘보기 좋고 읽기 쉬운, 그와 동시에 깔끔하고 예쁜 슬라이드’에 대한 강박이 생겼다. 단락 간 간격. 색의 대비나 조합. 이미지 배치. 이 모든 것이 자동으로 눈에 들어온다. 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머릿속 교정 모드가 켜지고 마는 것이다. ‘이건 내 강의가 아니다, 내 학생의 발표 자료가 아니다.’ 주문처럼 되뇌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날 객석에서 슬라이드가 자꾸 눈에 밟힌 것은 아마 나 하나뿐일 테다. 그 좋은 강연 앞에 개체 정렬이며 커서의 간격이며 글자의 크기가 뭣이 중하단 말인가.

강연에서 돌아온 후, 다시 내 PPT를 열었다. 혹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한 적은 없었을까 염려증이 돋는다. 그래도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이 ‘매의 눈’ 덕분에, 슬라이드 한 장이 더 보기 좋아졌을 지도 모르겠다. 매번 학생들에게 학기 말이면 말한다. 모든 이유 있는 마음들을 보살필 수 있기를 바란다고. PPT에 괜히 눈길이 가는 것도, 사실은 더 나은 강의와 더 좋은 전달을 위한 내 마음의 예민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마 다음에도 나는 또 슬쩍 누군가의 슬라이드를 눈으로 고치고 말 테다. 이 예민함을 나는 애정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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