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거!”
카랑한 목소리로 거실 공기를 가르며 아이가 나를 부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오도도도 걸음에 속도를 붙이는 것이 퍽 귀엽다. 아이 몸의 반쯤만 한 책 한 권이 땅에 끌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따라온다. 아이의 귀여움은 사라지고 아이 손에 붙들린 한 권의 책이 나를 잠식한다. 누가 부러 커다랗게 확대경을 붙여놓은 것 마냥 책의 표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속으로 작은 비명을 지른다. 아아, 또 그 책이구나. 벌써 입에 침이 바싹 마르는 것 같다.
[내가 일등할거야] 커다란 제목이 오늘도 내게 인사를 건넨다. 달리기 책도, 공부 책도 아니다. 정자와 난자의 만남을 비교적 사실적이고 귀엽게 표현한 성교육 책.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 지 비교적 일찍부터 궁금해하는 아이를 위해 은근슬쩍 책꽂이에 꽂아두었을 뿐인데 그것이 잘못이었나. 오늘로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다. 무엇이 아이를 유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었던 첫 날 이후로 아이는 거듭 이 책을 찾아들었다.
처음에는 흐뭇했다. 아이가 책 읽기를 좋아한다니. 심지어 아이의 관심사에 맞게 배치해 둔 그 책이 빛을 발한다니 엄마로서 더없이 뿌듯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지겨움이 밀려왔다. 같은 장면, 같은 대사를 수십 번, 수백 번 되풀이하다 보니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왔다. 아이는 글자를 모른다. 그런데도 이미 소리로는 다 외워버렸다. 나의 말투, 억양, 톤 심지어는 중간에 호흡까지 완벽하게 똑같이 따라하며 다음 번에 나올 문장을, 대사를 유려하게 소리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벌써 글자를 뗀 신동 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솔직히 말해 그만 보고 싶었다. 언제쯤 다른 책으로 넘어갈까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는 변함없이 이 책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찾아들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 몇백 번쯤은 거뜬히 넘을 정도로 이 짓을 반복하다보니 아이의 모습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책을 보는 태도였다. 아이는 늘 새로웠다. 내 허벅지에 찰싹 붙어 앉아 태어나 처음 이 책을 마주한 것처럼 두 눈을 반짝이고, 두 귀를 쫑긋거린다. 똑같은 장면인데 쇼파 끝에서 짤랑거리는 두 발에 기쁨과 즐거움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너는, 매 순간 이것들이 새롭고 즐겁고 흥미로울까.
그걸 알아챈 순간 새로운 세계의 빛이 미약한 틈새로 새어들었다. 반복이라 생각했던 시간이 사실은 매번 새로운 시간임을 알게 되었다. 어제의 아이와 오늘의 아이는 같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다. 그러자 지겹다고만 생각했던 책 속 장면들이, 아이와 함께하는 오늘이라는 배경 속에서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어떤 장면의 조각이 새롭게 보이고 하는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아이와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이 순간은 태어나 처음 아닌가. 갑자기 마음이 뜨겁고 뭉근하게 흘러 넘친다.
책의 마지막 표지를 덮으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또, 또!” 아이가 한 번 더 읽어달라고 재촉한다. 그래, 얼마든지. 나는 웃으며 책장을 다시 펼친다. 아이의 ‘한 번 더’는 지겨운 반복이 아니라, 우리에게 행복을 한 번 더 선물하는 주문이다. 오늘의 “또”가 쌓이고 쌓여, 언젠가 우리 삶의 단단한 추억이 될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새로운 추억 블록을 하나 더 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