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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심은 씨앗

by 밤비


강의를 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매번 고민이 많다. 이번 고민은 과제였다. 바야흐로 생성형 AI가 주도권을 빼앗기 시작한 시대. 단순한 과제물로는 학생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현장 글쓰기’를 도입했다. 당일 제공되는 주제 안에서 즉흥적으로 한 편의 글을 지어내도록 했다. 이유 있는 마음을 톺아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붙인 이름은 <범죄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글쓰기>. 이 세상에 이유 없는 마음은 없다. 범죄인에게도 제각기 마음에 이유들이 있을 것이라는 걸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첫 주제는 ‘비행청소년의 입장이 되어 글쓰기’였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A4 용지를 나눠주자 연필이 서걱서걱 종이 위를 달렸다. 어려워할 줄 알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종이를 채워나가는 모습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책상 사이를 걸으며 문장들이 태어나는 순간들을 감탄스레 지켜봤다.


강의실 정원 모두가 글을 완성했다. 학생들의 글을 한 편씩 읽으며 또 한 번 놀랐다. 문창과도 아닌데, 글마다 비행청소년의 모순과 갈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잘 쓴 글을 찾는 게 목적은 아니었다. 각기 다른 마음의 결을 통해, 그 마음에도 이유가 있음을 나누고 싶었다. 열 편의 글을 골라 강의시간에 함께 읽고자 컴퓨터로 일일이 옮겨 적었다.


오늘, 열편의 글을 이용한 피드백 강의를 마쳤다. 강의가 끝나고 조심스레 한 남학생을 불렀다. 일전에 ‘다정한 어른’에 대해 질문을 했던 터라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두 눈이 동그래진 학생은 잠시 망설이다 내 뒤를 따랐다. 나는 그에게 원고를 돌려주며 말했다.


“이 글, 너무 좋아서요. 돌려줘야 할 것 같았어요. 공모전에도 내면 좋겠는데, 평소에 글을 좀 쓰나요?”


강의 시간에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진하게 각인된 글이었다. 깊이가 다른 사유와 표현, 문학적 가치가 고스란히 담긴 글. 힘주어 말했다. 꼭 계속해서 글을 쓰라고. 여러 공모전에 글을 내 보라고. 충분히 그럴 만한 글이라고. 진심으로 응원하노라고.


나의 말에 남학생의 얼굴이 말갛게 피어오르는 그 순간 알았다. 내가 학생의 마음 정원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고 있음을. 언젠가 그 씨앗이 싹을 틔운다면, 오늘의 강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빛났다. 그리고 언젠가 그 꽃을 다시 마주할 수 있기를. 아니다, 설령 내가 그 이후의 일들을 보지 못한다더라도 괜찮다. 오늘 심은 씨앗이 누군가의 세계를 조금 더 환하게 밝혀준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 학생의 말간 얼굴 덕에, 오늘 내 정원도 충분히 흐드러지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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