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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쓰임

by 밤비


‘거리’를 듣고 먼저 떠올린 것은 멀고 가까움이었다. 두 지점 사이의 간격, 혹은 사람 사이의 미묘한 공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언어 속의 ‘거리’는 조금 달랐다. 사전에서는 이를 두고 ‘내용이 될 만한 재료’라고도 정의한다. 이야깃거리, 추억거리, 걱정거리, 안주거리, 구경거리…. 이 단어들 속 ‘거리’는 비어있는 틈이 아니라, 오히려 그 틈을 채우는 무언가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재료가 되는 셈이다. 이야기를 나누게 하고, 추억을 나눠먹게 하고, 걱정을 하게 만들고, 함께 앉게 하고, 또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쯤 되면 다시 처음의 거리로 돌아간다. 결국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고 가까움이 아니라 그 사이를 무엇으로 채우느냐로 정해지는 것은 아닐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는 이야깃거리에서 출발한다. 공통의 이야깃거리가 있을 때 관계는 오래 가기 쉽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도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이 톡 튀어나오는 순간, 말은 불씨가 되고 그 불씨는 온기를 만들어 낸다.


추억거리는 말 해 무엇하랴. 같이 나눠먹을 기억이 있다는 건 참으로 다정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을 공유하는 일이다.


이야깃거리와 추억거리만큼 따뜻한 말은 걱정거리다. 걱정거리는 마음의 반경을 나타낸다. 걱정이 된다는 건 마음이 닿는 범위 안에 당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걱정은 마음이 움직이는 거리의 단위다.


안주거리는 함께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내어준다. 술보다 중요한 건 안주가 아니라, 안주를 나눌 내 앞의 상대다. 안주거리는 결국 함께 앉을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안주를 앞에 두고 마주 앉는 일은 서로의 거리를 잠시 좁히는 일이다. 음식은 늘 관계의 증거가 되고, 함께 먹는 행위는 가장 단순한 방식의 화해이기도 하다.


구경거리는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다. 볼거리가 많다는 건 세상이 아직 나를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경거리가 사라지면 우리는 세상과의 거리 감각을 잃게 된다. 모든 것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다 보면 결국 지쳐버린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오래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구경거리는 삶의 호흡을 되찾게 만드는 여백이 되어준다.


거리란 본래 떨어져 있는 두 지점 사이의 길이를 뜻하지만, 언어 속에서 발견한 ‘거리’는 오히려 사람 사이를 채우는 단위가 되었다. 누군가는 그 안을 말로, 누군가는 추억과 걱정으로, 누군가는 음식과 웃음으로 채운다. 중요한 것은 멀고 가까움이 아니라 그 사이에 무엇이 흐르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오래된 누군가와 언젠가의 추억거리를 나누었고, 낯선 누군가를 향해 작은 이야깃거리를 하나 던졌으며, 두 눈 반짝이며 일상 속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하루를 건너왔다. 그렇게 하루하루 거리를 채우며 살아가는 일. 내게 ‘거리’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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