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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지 한 장

by 밤비



휴지라는 단어는 좀 독특하다. 흔적을 지우고 더러운 것을 닦아내는 얄따란 종이에 '쉼'이 들어있다. 쉴 휴(休), 종이 지(紙), 휴지. 마치 종이도 사람처럼 피로를 느끼다 잠시 누워야 할 것 같은 조합에 설핏 웃음이 나온다. 본격적으로 뜻을 찾아보면 조금 다르다. 고전 중국어에서 휴(休)는 멈추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거기에서부터 이어졌을 의미는 휴지에 잠시 멈춘 상태, 즉 완전히 폐기된 것이라기보다는 쓰임을 마친 종이라는 뉘앙스를 전한다. 휴지는 단순히 쉬는 종이가 아니라 쓰임을 다 해 잠시 멈춰 있는 종이다. 다시 쓰이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 오래 머무는 기억의 페이지인 셈이다.


다 쓴 뒤 버려지고 마는 존재. 짧은 시간 누군가의 볼을 적신 눈물을, 책상 위에 쏟아진 커피를, 아이 손등의 짜장 국물을 닦고 사라졌을 휴지. 으레 한 번의 쓰임을 끝으로 사라지고 마는 종이지만 그 위에는 늘 삶의,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비워내는 것이다. 비워졌다는 건 자리를 내주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멈춰있다는 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잠시 식어있는 상태에 가깝다. 휴지는 그저 무미건조한 한 장의 종이지만, 누군가의 손끝을 지나며 잠시 온기를 품는다. 사용이 끝난 후에도 오래토록 무언가를 기억하는 존재가 된다.


길었던 이번 연휴, 나는 한 장의 휴지 같은 시간을 보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열흘 동안 특별한 것을 계획하지 않았다. 매년 두 번의 명절은 2박 3일간 가까운 휴양림에서 양가 부모님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고정적인 이 행사 말고는 별다른 일 없이 비워두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휴양림에 있는 내내 비가 쏟아졌다. 빗소리를 촉촉한 배경음악 삼아 먹고 자고 놀기를 반복했다. (양가 부모님과 자주 뵙고 여행하는 사이라, 마음의 짐이나 불편감이 없다. 나이 많은 절친들과 여행갔다 여기면 좀 더 상상하기 편해진다.) 솜씨좋은 두 어머님이 식사를 도맡았기에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전원을 켜는 것, 그것도 전체 일정 중 두 번이 전부였다. 다정한 두 아버님은 끼니마다 설거지를 번갈아 하셨다. 아이를 전담해서 돌보아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도 슬며시 내려놓는다. 말 그대로 푹 쉬었다. 그 시간동안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끝없이 비워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마음은 차츰차츰 차오르는, 무언가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집을 떠나있다는 해방감까지 더한 2박 3일의 일정을 끝내고도 나머지 연휴 기간을 빈둥거리며 보냈다. 만날 사람이 갑자기 생기면 흔쾌히 만났고, 찾는 이가 아무도 없으면 집 안을 이리저리 누비며 한껏 늘어졌다. 세 식구가 다 녹아내린 슬라임같은 시간을 부유했다. 해야하는 일, 처리해야 하는 업무, 잘 해야 한다는 부담 같은 것에서 자유로워진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쫓기는 기분 없이 잠드는 밤의 감각이었다. 내일에 대한 걱정이나 계획 없이 편안히 잠들고 느긋하게 일어났다. 창밖의 햇살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가 다시 잠을 청하기도 하는 일조차 하루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이렇다 할 일이 없는, 그 '아무것도 없음'이 오히려 나를 충만하게 만들었다.


휴지는 버려지는 존재이지만, 그 안에는 잠깐의 쉼이 분명 있다. 손을 닦고, 눈물을 닦고, 커피자국을 닦으며 세상의 틈새를 정리하는 쉼 말이다. 우리의 휴식도 그와 비슷하다. 다시 움직이기 위해 잠시 멈춰있는 상태. 아무 의미 없는 시간처럼 보였던 열흘간의 휴가 동안 다음을 위한 온기가 천천히 모였다. 그렇지 않은가. 삶이란 결국 쓰고, 닦고, 다시 펴는 일의 반복이니까. 멈춤은 낭비가 아니라 회복으로 이어지는 여백이다. 쓰임과 쉼은 서로를 향해 이어진 기나긴 선 위에 있다. 삶의 문장들 사이엔 언제나 한 장의 휴지가 필요하다.


어떤 기록이나 쓸모로 채우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를 쉬게 해 준 흔적. 다시 쓰이지 않는 종이, 휴지처럼 나 역시 그 시간동안 잠시 멈춰 있었다. 그렇게 한 장의 휴지를 닮은 열흘을 차곡차곡 쌓은 나는 다음 삶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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