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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흉터 하나

by 밤비


나만 아는 습관들이 있다. 계단 내려가기도 그 중 하나인데, 사실 나는 계단을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움직이는 사람이다. 늘 층계참의 높이와 개수를 면밀히 살피고, 발을 정확히 딛는 동시에 계단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성큼성큼 잘만 내려가던데, 계단 앞에서만큼은 나무늘보가 된다.


초등학교 1학년. 3층 서예학원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 때는 나도 날아다녔다. 세 칸, 네 칸은 우습게 단숨에 내려왔다. 그 날도 그랬다. 계단 난간에 손바닥을 대고 미끄럼틀 타듯 쭈욱! 밀면서 네 칸을 뛰었다. 아뿔싸. 뜨거운 감각이 손을 덥힌다. 손목에서 손등으로 올라가는 중간쯤, 붉은 핏방울이 맺힌다. 돌아보니 철제 난간의 이음새가 뾰족하게 솟아있다. 살갗이 벗겨진 자리에 정직하게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울었던가. 너무 놀라 흡! 소리도 못 냈다. 조용히 계단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다른 손으로 다친 손을 꾹 눌렀다. 피가 멎을 때까지, 덜렁거리는 살이 다시 붙을 때까지 우두커니 자리를 지켰다. 그 자리에 흉터와 침묵만이 남았다.


삼십 대 후반. 벌써 20년이 흘렀거늘, 여전히 내 손에는 볼록한 흉터가 남아 있다. 얼핏 보면 꿰맨 흔적처럼도 보인다. 흉터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상처를 숨기기 바빴던 그 날의 작고 여린 내 모습뿐이다. 어디에도 말하지 않은 감정이 오래 가는 법이라는 걸, 어쩌면 이 흉터가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때 왜 혼자 해결하려고 했을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지금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혼날까봐 겁이 났던 건 아닌데. 정말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이걸 보여주는 게 두려웠던가. 순간의 아픔보다 그것을 내보였을 때의 무수한 반응들이 더 어려운 나이였는지도 모른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습관은 그 날 이후 생긴 몸의 언어다. 층계참을 세는 나는, 사실 다시 똑같은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애쓰는 아이의 연장선이다. 흉터는 아물었지만 흔적은 남았다. 말하지 않았던 그 사소한 기억이 지금의 나를 채우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다 말로 내뱉지 않은 기억들은 이렇게 몸에 새겨지는 걸 지도 모른다. 흉터가, 조심스러운 걸음이, 침묵이 하나의 궤로 엮인다. 그 때의 어린 내가 참았던 것들을 지금의 어른인 내가 조금씩 꺼내어 열어보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과정들을 하나하나 밟아간다. 늦은 고백이다. 아주 조용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속도로. 내가 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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